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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랑맘 Aug 03. 2024

아르기닌

하루 권장량 6000mg


오전 9시 35분. 우리 아파트 바로 옆 단지 언니를 내 차에 태우기 위해 기다린다. 차 문을 열고, 헐레벌떡 내 옆자리에 앉은 언니가 ‘아르기닌’ 한 포를 건넨다.      


“이거 먹어야 되겠더라. 너무 열심히 추면 손 떨려.”

“뭐야 뭐야 언니~ 너무 좋은데?”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르기닌'은 꽤 유명하다. 운동 전 공복에 아르기닌을 보충하면 펌핑이 극대화된다. 원리는 아르기닌이 혈관을 확장시켜 혈류량이 증가시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몸 안의 피가 잘 도니 상대적으로 적은 힘을 들이고도  운동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은 우리가 2주 남짓 수업을 듣고, 연습한 나연의 ABCD 안무 영상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딸내미가 질릴 정도로 연습하고 흔들어 댔으면 자신만만할 법도 한데 나는 조금 떨고 있었다. 떨림의 원인을 분석해 보면 잘하고 싶은 부담감 30, 크롭티에 핫팬츠를 차려입고 집 밖을 나가는 설레임 40, 한 끼만 배불리 먹어도 불뚝 나오는 배를 굶긴 대가로 겪는 생리적인 현상 20 정도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언니가 건네는 아르기닌 한 포는 내게 찌는 더위에 누군가 내미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알싸한 생리통을 진정시켜 줄 타이레놀 한 알이었다. 남김없이 짜내어 흡입한 아르기닌 한 포로 비로소 바짝 쪼그라들어 콩콩대던 내 심장이 펌핑을 시작했다.  배고픔과 긴장감은 누그러지고, 기분 좋은 설렘만 남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 껏 격양된 어투로 서로의 의상을 칭찬하고, 깔깔거렸다. 정신 차려보니 이미 연습실이다.


"너무 기대되잖아.!"

 

연습이 진행되는 중에 누군가의 엉덩이가 경박하게 흔들린다.     


“난 왜 이게 이렇게 폼이 안 나는지 모르겠어. 똑같이 흔드는데. 내가 흔들면 왜 마을회관이니.”     

“얼쑤~~” 내가 받아치며 더 세게 엉덩이를 흔들어 본다.

    

카메라를 세팅하고 계시던 선생님이 폭소하신다.     

누군가의 단호한 목소리.     


“필로 해 그냥.”     


깔깔깔깔, 짝짝 짝짝 웃음과 박수 소리가 뒤섞인다.  터진 웃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찍은 영상 속 우리는 흡사 걸그룹 아이돌 같았다. 어쩜 그렇게 춤이 딱딱 맞고 리듬감이 살아있는지. 그전 영상과 달라진 점은 웃는 얼굴뿐인 것 같은데 말이다.


30초 남짓의 짧은 파트를 수십 번 반복하고서야 모든 게 끝이 났다. 이제 나연 노래는 바이바이. 후련하다. 영상을 매번 찍다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날도 있고, 아쉬운 날도 있다. 아니 사실 매번 그랬다. 이렇게 후련하고 깔끔하게 미련 없이 마무리되는 경우는 댄스학원 수강 경력 1년 만에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연습을 많이 하기는 했다. 마지막 안무를 배우고, 촬영 날까지 3일 간 매일 한 시간씩은 흔들었으니 말이다. 계산해 보면 1분에 두 번 출 수 있으니 60분이면 120번 춘 것이다. 쉬는 시간을 감안해 하루에 100번이라 쳐도 3일 동안 300번은 족히 췄을 것이다.


"엄마, 나까지 외워버렸어. 이제 그만하면 안 될까?"


라고 딸이 말할 정도였으니.  나조차도 다시는 이 노래를 듣고 싶지 않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최근 3개월 간은 다른 노래들도 비슷한 연습량, 아니 이보다 더 한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래도 늘 굳은 표정과 갈 곳 잃은 손과 발이 내 눈에는 보였던 것이다. 물론 오늘 영상에서도 숨어있어야 할 오른손이 잠깐 포착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만족스러웠다.  다른 날보다 가벼워 보이는 몸과 여유 있는 표정 때문인 듯했다.







"당장 인스타 피드에 박제해야겠어!"


자뻑에 빠져 오늘 일들을 복기해 보며 짧은 글을 적었다. 그제야 '아르기닌'이 기억났다. 언니가 아침에 건넨 아르기닌 덕에 잘 출 수 있었다고, 다음엔 두 포를 먹어야겠다고 말이다.


그 밑에 댓글이 달렸다.


"그 아르기닌 나한테서 넘어간 거다!!"


아르기닌에 원조가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요새 이 언니 춤사위가 좀 남다르더라니! 며칠 후에 옆 단지 언니로부터 카톡 선물이 도착했다. 그동안 댄스학원 라이딩을 해줘서 고맙다는 메시지와 함께 무려 아르기닌 두 박스를 카톡 선물로 보내 온 것이다. 다음 날 배송된 아르기닌의 박스를 열어 설명서를 읽어 보았다.


아르기닌

'과다한 아르기닌 섭취는 위장 장애, 설사, 복통과 같은 소화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루 권장량 6000mg! 아르기닌은 한 포로 충분했다. 다음에 가져가서 한 포씩 나눠먹어야지.  내가 본 아르기닌 덕을 다 같이 누리고 싶어졌다. 기다려, 원조 아르기닌 언니!



사진: UnsplashGursimrat 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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