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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이나 Nov 22. 2024

첫째 날 1

아버지 집 찾기

“마을회관에서 남쪽으로 백 미터 내려가다 보면...옳지, 다리가 있어.”


다리 저쪽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보였다. 아버지가 그토록 가고 싶어 마지않았던 땅. 내 눈앞의 다리는 아버지가 마법지팡이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막대 끝으로 단단한 대지를 몇 번이고 두드려 이뤄 낸 기적의 다리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장군처럼 당당하게 아담한 다리를 건넜다. 좁은 찻길이 구불구불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길 오른쪽으로는 고라니가 망쳐놓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둘러친 옥수수밭과 계단식 논 마지기가 켜켜이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졸졸졸 시내가 흘러내렸다. 빨강과 검정 플라스틱으로 된 가짜 기와를 올린 한옥들이 미처 못 다 핀 기지개를 켜듯, 어정쩡한 자세로 띄엄띄엄 언덕배기에 앉아들 있었다.


“여긴 아냐. 저런 집들은 아버지 취향이 아니지.”


그럼 어디 있단 말인가? 1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홀로 살던 숲속 오두막집 말이다. 그 오두막까지 가 닿은 제대로 된 도로는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곧잘 말씀하시곤 했다. 그곳은 오로지 두 다리를 번갈아 놀려야만이 드나들 수 있는 천국이라고.


뙤약볕에 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이쪽저쪽으로 다녀 보았다. 도대체 어느 구석으로 올라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려 해도, 밭이며 논이며 벌여놓은 일들은 많건만 정작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햇살이 따갑지 않은 새벽에 일을 갈무리해 놓고 지금은 시원한 집에서 한잠들 자고 있나 보았다.


애초에 오두막을 직접 찾아보겠다고 생각한 내 잘못이었다. 시내의 부동산을 찾아가 집 주소만 대면 간단할 것을. 아니, 이곳으로 내려올 필요 없이, 서울에서 이곳 부동산으로 전화 한 통이면 끝날 일이었다. 아니다, 아예 서울의 부동산에 집을 내놓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디나 도시 생활을 접고 시골살이를 하고 싶어하는 퇴직자들이 널려 있을 테니.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집을 팔려고 내놓기 전에 내 눈으로 한 번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그 집에서 홀로 무엇을 꿈꾸었을까?


황금 같은 여름휴가를 맞아, 나는 애초에 아무 계획이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휴가도 반납하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 운영 상 휴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총무실의 주장이었다. 게다가 쓰지 않은 월차에 생리휴가까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아프리카 여행이라도 가서 잘 생긴 마사이 전사 하나 낚아오라고~”


곱상하게 생긴 총무이사가 벽이 투명한 회의실 안쪽에서 미소를 날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휴가야 썼다 치고 그냥 일이나 하게 해 주면 될 것을...동정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여자 같으니라고...”


하긴, 처량한 생각도 들었다. 손바닥만 한 원룸에 틀어박혀서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여행을 가고 싶지도 않았다. 여행은 해외출장으로 신물이 날 만큼 다니고 있으니까. 전 세계의 도서전이란 도서전은 이탈리아 볼로냐,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국 베이징, 일본 도쿄, 미국, 영국 런던까지 도시마다 최소 두 번 이상 다 참가했다. 물론 동남아시아 쪽으로는 여행을 가보지 못했지만...이 나이에 남자도 없이 거길 뭐 하러 간단 말인가.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한심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때였다. 사람이 지나다닌 듯한 흔적이 있는 작은 오솔길을 발견한 건. 뱀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산용 스틱을 땅바닥에 쿵쿵 밭게 박아대며 길로 들어섰다.


“와~”


평생 흰 종이에 박힌 검은 글자들만 보아 왔던 피로한 두 눈에 상쾌한 안약을 넣은 것 같은 개운하고 시원스런 풍경이 뛰어들어왔다. 온통 초록, 초록이었다. 짙은 초록, 엷은 초록, 거무스름한 초록, 씹으면 연할 것 같은 초록, 뻣뻣할 것 같은 초록, 깨끗하고 투명한 초록, 털이 숭숭 나 있는 초록... 끝없이 펼쳐진 바람에 흔들리는 계란꽃밭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무너져 가는 농가 뒤쪽에는 고흐 그림에 나오는, 마구 붓질한 모양의 삼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누군가의 조상을 모신 둥그스름한 무덤이 있었다. 거기까지였다. 막다른 길이었다.


“역시 이쪽 길이 아니었나...”


나는 힘없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때였다. 삼나무 가지에 뭔가 반짝이는 끈 같은 게 매달려 있었다. 은박 끈은 햇빛에 반짝이면서 내게 뭔가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산 위를 향하여 앞쪽 몇 미터 떨어진 곳을 내다보니 역시 그쪽 나뭇가지에 매달린 은박 끈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때렸다.


“젠장!”


길은 끝난 게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이 드나드는 밭과 벌초를 다니는 무덤 끝까지는 사람들에게 밟힌 풀들의 흔적이 있었지만, 그 너머의 길에는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홀로 다니던 길이 저 위에까지 뻗어 있음에 틀림없었다. 작년에 말라죽고 얼어 죽은 거무튀튀한 썩은 풀줄기 속에서 새로 태어난 풀들이 마구 엉켜 자라 있어 길이라곤 보이지 않았지만.


풀은 그리 작지 않은 내 키보다도 높게 자라있었다. 도시 여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헤치고 나아갈 수 없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날렵한 진검이라도 들고 와서 풀들을 가르고 베면서까지 아버지의 집을 봐야 하냐구? 나는 큰 한숨을 한번 쉬고 나서, 천천히 머리를 쥐어뜯었다.     


손바닥만 한 읍내 철물점에 가서 낫을 하나 샀다. 낫질은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검술은 좀 할 줄 알았다. 집에서 목검을 챙겨올걸 싶었다. 웃음이 피식 나왔다.


먼저 내 앞에 우뚝 선 대 굵은 풀의 위쪽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아래쪽을 베었다. 슥 하고 베였다. 낫이 너무 잘 들어서 오히려 섬뜩했다. 잘못하면 다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하다간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 모르겠다 싶어서 풀을 몇 개 더 잡고 한꺼번에 베려 하자 잘 잘라지지 않았다. 힘이 부족한가? 내가 한 힘 하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요령이 없어서가 아닐까? 아니면... 이 잡초들은 말이 풀이지 생나무나 마찬가지로 두꺼운 줄기를 하고 있는 미니 나무들이라 할 수 있었다. 저희들도 살려고 섬유질을 억센 근육과 같이 키워놓은 탓이리라.


기분에 한나절은 이 일에 매달린 것 같았다. 풀 사이사이에는 큼지막한 거미가 붙은 거미줄마저 사뿐히 올라앉아 있었고, 한 발짝 옮길 때마다 자디잔 메뚜기와 풀벌레, 개구리들이 끊임없이 튀어올라 식겁했다. 허리를 펴느라 잠시 쉬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숲이 무섭도록 괴괴하다는 걸 알아차리곤 했다. 멧돼지가 나오지 않을까? 뱀은? 풀을 베면서 작은 소리에도 흠칫 놀라며 괴팍한 아버지에 대한 불평불만을 혼잣말로 늘어놓았다. 햇볕은 또 얼마나 따가운지! 시계를 보니 30분밖에 안 지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버지는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셨을까? 오두막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은박 끈까지 매달아놓았으니 포기할 수도 없지 않냐구! 으이구. 애초에 여기까지 와서 그걸 발견한 내 잘못이지.


화가 났다. 나는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으면서 낫을 한쪽에 던져 버리고 두 손으로 빽빽한 풀 사이를 홱홱 가르며 성큼성큼 오솔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다가는 한번 젖혀진 풀줄기가 부메랑처럼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내 뒤통수를 때렸다. 으악! 멧돼지라도 나왔나? 에이, 내가 뭘 두려워하는 거지? 멧돼지고 호랑이고 뭐고 나오기만 해 봐라. 내 검술 실력을 보여줄 테니! 나는 오른손에 스틱을 단단히 잡았다.


길에 풀은 무성했지만 발에 채일만 한 돌덩이나 나무 그루터기 같은 건 없었다. 아버지가 다 치워 두었을 터였다. 아버지는 꼼꼼하고 세심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자신이 죽은 후, 자신이 살던 오두막에 찾아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선머슴 같은 딸을 위해 사랑의 은박 끈을 저리 매달아 두었으랴고.


오솔길 왼쪽으로는 시내가 졸졸 흘러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목이 몹시 말랐다. 하지만 길가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물이 깨끗하다는 보장도 없었다. 덤불 아래 은밀한 곳 아래에는 왠지 누군가 숨겨둔 시체라도 썩어가고 있을 것 같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물 한 모금이 없다고 이런 끔찍한 생각을 하다니. 나는 산에 오면서 멋들어진 등산복과 등산화만 챙길 줄 알았지, 실용적인 건 하나도 생각 못했다. 말하자면, 물이나 간식 같은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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