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옮김, 문학사상
무라카미 하루키를 수식하는 말들에는 유독 최초, 최장 같은 타이틀이 붙어 있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40여 개국에서 대부분 번역되어 장기 베스트셀러이며, 서양의 문학으로 일컫는 세계문학이라는 중심 무대에 선 최초의 동양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나는 무라카미의 작품 중 <노르웨이 숲>을 제일 먼저 접했다. 그 당시 독서에 대한 조예가 없었던 이유인지 아니면 우울하고 음산한 분위기의 글을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내게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다음으로 본 책이 <1973년의 핀볼>이었는데 역시 내게는 모호하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무라카미의 책은 내게 맞지 않다며 멀리하다가 이번에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행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려진 축제를 대할 때의 기분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나는 작가에 대해 처음으로 호기심이 생겼다. 군더더기 없는 문체와 깊은 사유에서 나온 글들이 나를 매료시켰다. 더군다나 이 책은 에세이 형식이지만 자신을 현란하게 내보이는 대신 마라톤을 중심축에 두고 쓴 회고록에 가까웠다.
"나는 회고록이나 자전적 소설을 쓸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소설을 써왔다고 하는 것과 같은 실제적 기록은 어느 정도 남기고 싶다. 어떤 경위로 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어떤 상태로 살아왔는가 와 같은 것은 쓰고 싶다. “(p270)
이 책을 ‘한 그루의 나무’라고 표현하고 싶어졌다. 마라톤이 나무의 굵은 원줄기를 이루고 있고, 기록을 경신하고 작품을 탄생시킬 때마다 가지가 하나하나 뻗어 나온 듯 했다.
마라톤광이거나 혹은 달리기를 즐기는 분이라면 이 책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무라카미가 마라톤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의 20여 년을 달렸고 25번의 마라톤 완주를 했다.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순간을 넘기면서 잡념을 연소시키고, 새로운 에너지로 치환하는 일종의 숭고한 의식으로 느껴졌다.
“‘나는 인간이 아니다. 하나의 순수한 기계다. 기계니까 아무것도 느낄 필요가 없다.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타일렀다. 거의 그것만 생각하면서 참았다. 만약 내가 피도 살도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거나 하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도중에 허물어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p170)
에세이를 포함해서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글의 형식을 빌려 쓰면 좋겠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광고했다. 자서전, 회고록이라 해서 한 사람의 일생을 다 다룰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이라는 나무의 큰 기둥을 중심으로 소소한 가지들은 끼워 넣기 형식이면 족하다. 자신의 족적을 남기고 싶어 쓰는 책인 만큼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읽을거리와 배울 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 개인의 전 생애를 다루는 일은 어쩌면 무모한 도전인지 모른다. 자기만의 전문적인 분야의 경험을 중심으로 자신의 회고록을 쓴다면 세상에 하나뿐인 매우 유용한 읽을거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직업상 계속 앉아서 글을 쓰다 보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이 불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몸을 단련시키는 일만이 오랫동안 글을 쓸 수 있는 동력이 되겠다고 자각한다. 많고 많은 운동 중 달리기를 선택한 이유는 다른 누군가와 약속을 잡거나 파트너가 없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달리기가 자신에게 딱 맞는 운동이었고 달리는 것에 즐거움을 느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해서 20년 이상 계속 달릴 수 있는 것은, 결국은 달리는 일이 성격에 맞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좋아하는 것은 자연히 계속할 수 있고,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계속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무라카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 말에 대해 나는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시작했다가 금방 시들해지고 포기해 버리기 일쑤다. 그에게 있어 ‘달리기’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면도 있었겠지만 ‘글쓰기’에 중요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무라카미는 자신도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라고 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MBTI에서 I유형인 셈이다. 소설가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서 고립과 단절은 피할 수 없는 여정이라고 얘기했다. 극한 운동으로 자신의 가장 밑바닥까지 한계를 느끼면서 완전히 비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 비워내야지만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으로 체득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육체를 소모하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몸으로 인식하면서 고립과 단절을 치유했다고 한다.
“나는 신체를 끊임없이 물리적으로 움직여 나감으로써, 어떤 경우에는 극한으로까지 몰아감으로써, 내면에 안고 있는 고립과 단절의 느낌을 치유하고 객관화해 나가야 했던 것이다.” (p.41)
그는 누군가로부터 까닭 없이 비난받았을 때, 또는 당연히 받아들일 거라고 기대하고 있던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못했을 때도 언제나 달렸다. 결과적으로 육체를 소모하는 것이 정신을 더욱 또렷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우울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정신과나 상담에서 격렬한 운동을 추천한다고 한다. 무라카미가 오랜 세월 많은 스테디셀러 작품을 쓸 수 있었던 것도 격렬한 ‘달리기’ 덕분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하루키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재능이 타고난 것보다 후천적으로 길러졌다고 말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어도 집중력과 지속력을 가지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는 타고난 재능은 없어도 후천적으로 기른 재능(집중력과 지속력)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거라며 겸손의 말을 했다. 타고난 재능 없어도 자질을 키우면 된다는 말에 방점을 찍어 들으니 약간의 위안이 되는 대목이었다.
“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해 나갈 수도 있다. “(p.121)
오래전부터 이 책의 제목을 들어왔지만, 무라카미가 ‘달리기’에 이렇게 진심이었는지 미처 몰랐다. 그의 많은 작품이 창작될 수 있었던 배경에 ‘달리기’는 감히 거부할 수 없는 근간이었다. 달리기 시작한 후 20년이 지나고서 이 책이 나온 것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만큼 자신을 내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신이 좋아하는 달리기를 통해 얻었고, 자신의 한계를 알게 해 주는 고통의 극한을 맛보면서 채워 넣기가 가능한 경지에 닿은 그였다.
거장의 삶의 태도를 배우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1. ‘달리기’가 무라카미의 글쓰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2. 작가에게 ‘달리기’가 있듯,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여러분도 가지고 있나요?
3. 집중력과 지속력을 단련하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다면 나누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