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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Mar 09. 2024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전은경 옮김, 들녘> <논제 포함>

이 소설은 추리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어느 날 밤 늘 다니던 다리위에서 낯설고 이상한 행동을 하는 여인을 보게 된다. 포르투갈어 한 마디 남기고 사라진 그녀로 인해 헌책서점에서 포르투갈의 파라두라는 작가의 책을 우연히 알게 된다. 책의 한 문구에 매료되어 저자의 실제 삶에 호기심을 느낀다. 강한 이끌림은 그를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데려다 놓는다. 고전문헌학자이면서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껏 일탈이라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연되고 고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계획에도 없던 이 모든 일을 하게 된데는 우연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은 책의 저자인 파라두의 삶을 하나의 거대한 그림으로 보고 퍼즐조각들을 맞춰가듯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파라두 주변의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본 그의 모습에 국한되어 그를 이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를 매료시킨 책 속 한줄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p.28)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 프라두가 한 말이다. 그레고리우스는 이 한 마디로 인해 자신을 하나의 경험 안에 가둬 두었다는 어떤 억압을 느낀 것일까.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경험을 좇아야 한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힌 것일까. 공교롭게도 그레고리우스는 아버지의 강요로 의학을 전공하게 된 파라두의 이야기가 마치 자신에게 쓰여진 글처럼 그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프라두의 가정환경

포르투갈 독재정권 아래서 판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부드러운 독재인 어머니 그리고 숨막히도록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생들 속에서 불운한 생활을 보낸다. 


“부모들이 지닌 의도나 불안의 윤곽은, 완벽하게 무기력하고 자기가 어떻게 될지 전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달군 철필로 쓴 글씨처럼 새겨지지. 우리는 낙인찍힌 글을 찾고 해석하기 위해 평생을 보내면서도, 우리가 그걸 정말 이해했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어.”(p.453)


파라두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내용이다. 이후 파라두는 독재정권을 위해 일하는 아버지에 반항하기 위해 저항운동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컸다. 

또한 어머니에 대해서도 실패한 경계 짓기, 도를 넘어선 일 욕심,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요구, 춤을 추지 못하고 놀지도 못하는 성격 등이 모두 어머니와 어머니의 부드러운 독재와 관계가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그레고리우스는 어째서 시시때때로 아내 플로렌스를 떠올렸나?

아내와는 이혼을 했고 혼자 살면서 연구에만 몰두하는 사람이었다. 리스본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서 아내와의 과거 일들을 떠올리며 연관을 짓는다.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게 아니에요!”(p.503)  
“왜 이런 모든 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을 털어내지 못할까?”(p.503) 

아내의 말이 2,30년 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아팠기 때문이리라. 마치 자신을 지루한 사람이라고 취급한 아내에게 그렇지 않음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리스본으로 떠나는 과감함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파라두가 저항운동에 참가하게 된 진짜 사연은?

독재에 부역하던 경찰간부 멩지스가 사경을 헤매며 의사인 파라두 앞에 나타났을 때 파라두는 개별로 존재하는 한 인간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파라두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많은 사람들은 그런 파라두를 반역자라며 비난한다. 파라두가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 이유를 멩지스 사건으로부터 받은 비난을 변호하기 위함이라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프라두의 탈선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향한 모든 기대를 실망시키고 금기를 깸으로써 구제됐고, 등이 굽은 채 판결을 내리는 아버지와 야심만만한 어머니의 부드러운 독재와 평생 숨이 막히도록 고마움을 표시하는 동생으로부터 해방되어 드디어 평화를 얻었다.”(p.498) 


위 글은 프라두가 탈선하는데 근거가 되는 말인데, 그의 저항운동의 진짜 이유는 가족에서 찾을 수 있다해도 무방할 것 같다. 



◆ 나눠보고 싶은 얘기들


1. 이 소설은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책방 주인이 들려준 포르투갈의 프라두라는 작가의 글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p.28)”을 듣고 갑자기 리스본으로 훌쩍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리스본에서 프라두라는 인물에 얽힌 이야기를 파헤치면서 나와 남이 알고 있는 나 사이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데 주목하고 있는데요. 그러면서 소설의 마지막 부분, 그레고리우스가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p.570)라고 쓴 프라두의 말을 떠올립니다. 여러분은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의 이와 같은 말을 다시 새긴 이유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한다. 그것조차도 우연히 이야기할 뿐, 그 경험이 지닌 세심함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와 멜로디를 주는 경험들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다가 우리가 영혼의 고고학자가 되어 이 보물로 눈을 돌리면, 이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알게 된다. 관찰의 대상은 그 자리에 서 있지 않고, 말은 경험한 것에서 미끄러져 결국 종이 위에는 모순만 가득하게 남는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들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p.28)

어두워지는 길을 운전하여 병원으로 가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가 썼던 글이었다.(p.570)


2. 프라두가 멩지스를 살려내자 사람들은 그를 맹렬히 비난합니다. 프라두는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p.240)라며 군중들에게 외칩니다. 인간백정을 살려냈다며 사람들이 프라두에게 등을 돌리자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이유를 묻습니다. “한 사람 대 여러 사람의 목숨, 이런 식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 않나요?”(p.253)라고 한 말은, 멩지스를 더 큰 범위 속에 한 요소로 생각하지 않고 개별적인 한 인간으로 여겼다는 아마데우 자신의 정당성을 스승에게 확인하는 말이었는데요. 여러분은 프라두가 저항운동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그는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인간이에요.’(p.240)

그를 죽게 그냥 내버려두었더라면 내 기분은 지금 어떨까? 사람들이 나에게 침을 뱉는 대신 치명적인 나의 방임을 칭송했더라면? 분노를 뿜어내는 실망 대신 느긋한 안도의 숨소리가 골목에서 들렸더라면? 난 분명 악몽을 꿀 정도로 시달렸을 것이다. 이유가 뭘까? 내가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서? 아니면 그를 죽게 내버려두는 냉혹한 행위는 내가 나 자신에게 낯설어짐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의 나도 그저 우연의 산물일 뿐이 아닌가.(p.251)


3. 그레고리우스는 여행을 마치고 리스본을 떠날 때에도, 다시 베른으로 돌아와서도 줄곧 사진을 찍습니다. 그는 세상에 동화하여 살기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계산이 된, 거리를 둔-이 더 옳은 것이 아니었을까”(p566)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그는 인화된 사진을 보면서 “사진들은 모두 낯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p.567)고 말하는데요. 여러분은 그레고리우스의 이와 같은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세상에 동화하여 살기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의 시선-계산이 된, 거리를 둔-이 더 옳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p566)

사진이 나왔다. 그는 벨레뷰 호텔의 레스토랑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사진을 보면서 ‘사진들은 모두 낯설었다. 그와 아무 관계가 없는 듯했다. 사진을 봉투에 다시 집어넣고 식사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허사였다.(p.567)


4. 주앙 에사는 아마데우가 저항운동을 하기위해 자기들에게 온 이유를 “멩지스 사건 때문에 받은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p.370)기 위해서라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말합니다. 또 에사는 아마데우가 저항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그의 ‘역설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에사의 이와 같은 말에 공감하시나요?                    

아마데우는 아주 역설적이었소, 자신감에 넘치고 두려움을 모르는 행동 뒤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이었소. 우리에게로 온 이유도 그거였소. 멩지스 사건 때문에 받은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려는 것, 내 생각에 에스테파니아는 그가 드디어 법정 바깥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인생이 장소로 나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소.(p.370)

- 공감한다

- 공감하기 어렵다. 


5. 그레고리우스는 아내 플로렌스가 자신을 절대 지루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신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p.503)라고 말한 것에 그 상처를 지금까지도 기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아마데우도 “당신은 너무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p.553)다고 한 에스테파니아의 말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고 합니다. 두 인물 모두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들은 말로 깊은 상처를 받는데요. 그렇다면 이는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문구의 일종인가?”(p.537)라고 말한 그레고리우스의 생각과 두 여인의 발언을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다고 여기시나요?


당신 내가 지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네? 문두스, 그런 건 묻는 게 아니에요!  왜 이런 모든일이 지금까지도 이렇게 아플까? 왜 20년 30년이 지나도록 이 기억들을 털어내지 못할까?(p.503)

그는 오로지 자신만의 여행, 자기 영혼의 억압된 분노를 향한 여행에 제가 동행하기를 원했던 거예요. 저는 아마데우에게 당신은 넘 허기졌다고, 그 여행에 동행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을 향한 그의 허기가 무서웠어요. 삼키고 파괴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허기....이루 말할 수 없이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에요.(p.553)

사람의 정체성은 언제 유지되는가. 늘 그래왔던 그 모습일 때? 스스로를 바라보았을 때처럼? 아니면 들끓는 생각과 감정의 용암이 온갖 거짓과 가면과 자기기만을 묻어버릴 때? 달라졌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사실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이 아니라는 뜻인가? 그러니까 타인의 안녕에 대한 걱정과 염려라는 가면을 썼을 뿐, 결국 익숙한 것이 흔들릴까봐 대항하는 투쟁문구의 일종인가?(p.537)

-연관 지을 수 있다.

-연관 지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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