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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나 Sep 22. 2024

허무

지금 호텔에서 체크 아웃하기 1시간 전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국내 여행은 어릴 때부터 가까운 경남 쪽으로 잘 다녔지만 해외여행은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그리고 내가 콘서트를 보고 싶거나 일이 있거나 하면 몇 년에 한 번 서울을 싫어하면서 주로 당일치기나 이모 집, 찜질방, 모텔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어느 때는 이모랑 엄마는 내가 결혼하면 돈 없는 사람이랑 결혼해도 괜찮냐는 가정을 하면서 이모부와 아빠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심각하게 싸우고 아침이 되면 아무렇지 않은 척 넘어갔다. 그때 분위기 상 가만히 있어야 했지만 나는 비혼주의 페미니스트라 황당한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도 없었지만 어릴 때는 더 사정이 안 좋은 주변 애들도 있어서 별 생각이 없었고 몇 주 전까지도 나는 바깥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 해외여행도 안 맞을 거 같다고 생각했으나 허휘수 채널에 여행 콘텐츠를 보고 내가 해외여행을 가지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됐다. 등단이나 취업을 늦게 하고 노동 환경이 좋지 못한 곳에서 살까 두려운 무의식이 평생 있었다. 할머니는 시대도 반영되었겠지만 지방에 살고, 문맹이고, 평생 택시를 타지 않았던 사람이고, 차를 타고 다니는 엄마가 돈을 사치스럽게 쓴다고 생각할 정도로 돈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가치고, 돈을 자기 기준에서 조금이라도 많이 쓰는 사람을 대놓고 공격적인 말투로 대하고,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말을 함부로 자기도 모르게 하게 되는데 사람이 자기 때문에 왜 상처받는지 거의 몰라서 내가 본 평생의 명절마다 모든 자식과 싸우고 돈을 아끼라고 간섭하고 부딪히는데 그게 모든 사람들은 그게 나쁜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할머니가 상처 주는 말을 계속하니까 할머니와 관련된 자식과 그들의 아내와 남편과 손자들은 모두 할머니로 인해 (지금도 다들 정신과를 가지 않고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하지만 할머니도 울 정도로 공감 능력이 있고 자기도 상처를 많이 받고, 내가 성인 ADHD고 나는 수많은 책을 읽었기에 할머니가 성인 ADHD로 의심되어서 할머니를 일정 부분 이해했다. ADHD가 아니라도 할머니는 심리 상담이 모든 식구 중에 가장 필요하고 할머니가 성격이 좋아진다면 모든 식구들도 정신과나 상담 센터에서 상담을 받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내일 혼자 장거리를 이동해 고향에 찾아가서 할머니를 데리고 예약해 둔 정신과와 상담 센터를 둘 다 갈 것이다. 그리고 집안의 모든 식구 어른과 싸워서라도 할머니를 도울 것이다.


할머니는 “돈을 아끼는 것”이 모든 인생이고, “식구들이 자기를 찾아오는 건 자기가 돈이 많아서”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식구는 모르지만 일단 아빠와 고모는 할머니를 아직도 사랑하고 아빠가 할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우리 아빠는 자기 가족이 같이 있는 것도 좋아하고 사랑이 많아서 주위 사람을 늘 챙기고 성격이 둥글고 누가 보면 당하고 살 정도로 착하다는 심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고집이 정말 강하다. (우리 가족은 다 강하긴 하다.) 나도 아빠를 닮았다. 한 번 옳다고 생각한 것을 꺾지 않는 편인데 아빠는 늘 똑같은 공무원 일과 똑같은 농사를 반복하고 매일 고되어서 친구가 많고 (외할머니 장례식에 아빠 지인이 사업하는 큰외삼촌 지인 다음으로 많이 왔다. 아빠는 밖에서 동창이든 고향 친구든 가족이든 사람이 많고 잘 챙기고 정도 많은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 영향을 당연히 받아서 엄마와 정반대로 꾸미는 것에 관심이 없고, 한 번 안 해본 건 잘 안 하니까 엄마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 살고, 엄마가 아빠를 계속 말로 괴롭혀도 자기 가족 일 같은 게 아니면 정말 잘 참는다. 엄마도 인정한다. 할머니가 성격이 저렇게 “우악”스러운데 아빠 같은 자식이 어떻게 태어나서 저렇게 착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잘하고, 할머니를 위해 늘 헌신하고, 매일 농사와 공무원 일을 병행하고, 인간관계 문제 같은 건 하나도 이야기하지 않고 힘든 티를 거의 내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에 반해 매일 아빠는 “나도 돈 없다”라고 엄마 표현대로 “죽는소리”하기는 하는 것 같다.


엄마는 몇 년 동안 언어와 관련해 프리랜서 일과 아빠의 농사와 우리의 양육과 집안일을 병행하고 최근 2년 전에는 할머니와 상담하고 운전해 주는 요양보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정기적인 수입을 얻기 시작하고, 엄마가 말하기를 “아빠가 엄마에게 돈을 주지 않고 자기가 벌어서 써야 한다고” 했다.


나는 생각한다. 이건 표면적으로 돈이 아니라 “돈”으로 인한 “안정 애착”이라고. 엄마는 아빠보다 더 가난했고 태어나 보니 집이 무너져 가고 다인원 가족에 쌀밥이 귀한 시대에서 자라왔지만 중학생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외삼촌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다른 가족 집에서 더부살이를 시작하면서 그 어린 나이에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서울에서 큰외삼촌의 일을 돕고, 다른 직장에서 취직을 하면서 살다가 외할머니를 보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는데 아빠와 소개팅을 하고 구애를 아주 열심히 했고, 외할머니는 사주를 신빙해서 엄마가 아빠와 결혼하길 원해서 결혼하고 동남아시아 부근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아빠도 지방이 고향이었고 단독 주택의 집이 아빠 명의로 있어서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90년대 단독주택. 내가 태어났고 남동생이 태어났고, 단독 주택 안에 다른 방들에 세를 내주었고, 단독 주택은 거의 고쳐지지 않았고, 우리 집에서는 거의 아무도 자기 공간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매일 부딪히기 쉬웠고 집이라는 공간 자체가 90년대에 머물러 있고 그 공간이 리모델링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집은 열악했고, 아빠는 자주 집을 떠나서 바깥에서 일을 하고 집에 오면 매일 티브이만 보고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엄마가 매일 밥을 차려오는 것을 먹고 누워서 다시 티브이를 보기만 하면서 그 열악함에 대해 신경 쓰지 않고 지금까지 농산물을 단독주택에 두어야 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집을 고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있다.


내게 집은 열악의 공간이다. 그러나 유년기에 가족과 행복한 기억도 있다. 하지만 집에 나는 많이 있었고 지방이라 놀거리는 영화관 가기만 주로 있었기에 많은 체험을 하지 못했다. 중학생 때 아이돌을 좋아하고 서울에 올라가 콘서트를 본 뒤로 몇 년에 한 번은 모텔에 숙박해서 콘서트를 간 적만 있다. 그래서 오늘 서울에서 호텔을 처음 가봤고 지금 서울의 공연과 축제를 검색해 보니까 패배감, 허무감, 아쉬움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부러웠다. 일상이 이런 것들이라. 나는 몇 년에 한 번이었던 것을 매일 접하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이름만 들어본 서울의 지명과 대학을 매일 마주하며 저 대학에 가야겠다고 쉽게 생각하는 삶은 얼마나 편했을까.  


4성급 호텔도 별거 아니구나. 이렇게 쉬운 거였는데 부모님은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매일 모텔을 갔던 거구나. 돈을 버는 것보다 돈을 쓰는 게 더 중요하구나. 돈을 써야 처음 하는 체험이 내게 이렇게 좋을 수 있고 더 많은 세계를 선물해 줄 수 있는 거구나.


내 남동생도 우리 부모님도 이런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다. 남동생은 학교 때문에 일본을 다녀와서 더 나보다 식견이 넓어진 부분도 있겠지만. 글을 쓰다 보니 그냥 이번주에 일본이라도 혼자든 한 명 친구를 데리고 가든 바로 다녀와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그냥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한 번도 접근성이 없어서 정보력이 없어서 평생 해보지 못해서 두려웠거나 굳이?라고 생각하거나 못 먹는 포도처럼 신포도일 것이라 자기 합리화를 했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많은 책을 읽고 정보를 배우고 항상 어른스럽다는 말을 듣는 사람인데도 이것을 최근까지 몰랐다.


가난과 가난 강박은 안정 애착을 망치고, 새로운 경험을 하지 못하게 신념을 만들고, 내가 현재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무력감을 준다. 그리고 내가 가난에서 벗어난 상태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게 하고 계속 돈을 아끼면서 가난한 삶을 살게 만든다. 1000원 김밥을 팔아서 전재산을 학교에 기부한 할머니 사례를 생각한다. 그 할머니 같은 세대는,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중년조차도 평생 체험 정보가 부재해서 돈을 어디 쓸 수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지금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부모님을 나와 같다고 느껴서 자기 동정처럼 부모님을 동정하게 된다.


이렇게 과거를 톺아 보니 내 남동생이 거의 매일 쉬는 시간도 적은 고강도 육체노동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이유를 알겠다. 내 남동생에게 심리 상담의 가치를 어서 전하고 싶고 내 남동생이 내가 많이 엇나가고 남동생에게 언어폭력을 거의 평생 했는데도 남동생은 일정 부분 내 성격이 부모님과 부모님의 가난 때문에 그렇게 된 이유를 이해하고 나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미워하지는 않고 지금도 나와 성향적으로 맞지 않아 나를 싫어하지만 내 동생은 생각이 또래보다 깊고 나는 남동생에게 더 많은 배움과 가치를 주고 싶고 성폭력이 한국 남자의 취미가 된 사회에서 내 남동생이 엄마와 나를 때리거나 하는 등 나쁘게 엇나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동생에게 많이 고맙다. 나를 일정 부분 이해해 줘서.


그리고 나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빨리 외국을 가서 부모님과 연을 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의 평생 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인정한다. 아빠는 나와 같이 살 때는 내게 농사를 많이 하고 집에서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엄마에게 밥을 내오라고 하는 가부장적인 경상도 남자였지만, 계곡 같은 곳을 가면 늘 고기를 구워주면서 자기는 잘 먹지 않고, 자기 사람에게 헌신하고 동시에 내게 매일 사랑한다고 하고, 자식을 내가 모르는 마음보다 더 사랑할 것이고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 내가 대학을 가고 3년이 되었고 1년에 3번도 고향에 가지 않는 딸이었는데 계절마다 나무가 예쁘면 나를 생각해서 문자로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내오는 사람이고, 나를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고, 동시에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여자가 왜 남자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고, 내가 몇 년 동안 아빠에게 어떻게 보면 언어폭력을 가했지만 아빠는 그래도 나에게 손을 올리는 제스처와 시늉을 하면서 위협만 하고 큰 소리를 치고, 나를 직접적으로 때린 적은 없고 가부장적인 사고의 발언과 일상의 행동으로 나를 평생 화나게 했지만 내가 2년 전에 장문으로 내가 아빠한테 트라우마가 있었는지 문자를 보내고 아빠는 그것을 다 읽고 “미안해”라고 문자 했고 그 뒤로 장문 언급은 부모님이 둘 다 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경제적 지원을 해주면서 나를 압박하지 않고, 장문 뒤 몇 개월이 지나서는 여행을 한 뒤에 아빠를 안아주면서 미안하다고 했고 아빠는 자기가 더 미안하다고 말했고 더 우리는 대화와 정기적인 상담이 필요하지만 할머니가 주기 상담을 한다면 부모님도 나와 상담 센터에서 나와 상담을 할 수 있을 거니까 나는 부모님의 변화를 믿는다.


설령 부모님의 변화의 믿음이 실패한다고 해도 나는 극단적으로 살면서 부모님이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내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나에 대해 공부하고 살라고 할 것이고 부모님이 계속 나를 힘들게 하는 말을 한다면 나는 부모님을 무척 사랑하지만 부모님과 거리를 최대한 두기 위해 이민 가서 살 생각도 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디 가서도 잘 살 것이다. 나는 내 정체성을 혐오하는 사람에게도 내 정체성을 숨기며 그 사람을 즐겁게 하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 지금 사막에 떨어져도 인간만 거기 있다면 생각보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소통의 동물이고 우리는 더 좋은 긍정적인 단어를 타인에게 들려주면 된다.


20분 뒤에 나는 내 첫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북페스티벌에 가서 사랑하는 언니와 즐겁게 웃고 다른 곳에 가서 여자 이야기를 하며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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