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와 구포국수와 키친타월을 얻었다
여윳돈이 생겼다. 꽤 큰돈이, 그것도 본연의 종이돈으로. 컴퓨터 모니터가 되었든 휴대폰 액정이 되었든 어느 너머의 숫자로만 확인할 수 있던 것의 실물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다. 작은 불씨만 일어도 그 가치를 금방 잃을,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나약한 얇은 종잇장일 뿐이다. 이래서 사람들이 물건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볼품없는 것을 물건으로 바꾸어 그 실제 가치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원치 않는 노동으로 인한 구속과 억압이, 의미 없는 사람들과의 나인 투 식스가, 그 속에서 그저 하루하루 노화됨이. 내 생각처럼 헛된 것만은 아님을 확인하는 것이다.
본연의 그것은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어느 책 사이에 두 달 가까이 꽂혀있었다. 가끔 생각이 나 책을 들춰 존재를 확인했는데, 나중에는 그것이 책의 한 페이지와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숫자로 가지고 있는 것이 낫겠다. 작정을 하고 예금에 넣어두기 위해 종잇장을 펄럭거리며 나섰다.
"예금하려고..."
"얼마나 하시게요?"
막상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어느 책의 53페이지와 54페이지 사이에서 53.5페이지 정도의 모양을 하던 것일 뿐인데 숫자로 바꿔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어쩐지 부루마블을 할 때 쓰는 화폐를 내미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이 큰 숫자가 될 것이라는, 경험칙에 의한 확신이 있다.
"x만원..."
큰돈이 있어도 당장의 용처가 없는 무난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에 어쩐지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겸손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나의 행색이 이러하지만 이 돈이 나에게 유난을 떨 만큼 큰돈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내 수중에 이런 돈이 있다 해도 어디서 감히 있는 체를 하거나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하는 그런 상식 밖의 사람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태도도, 그러나 이런 겸손을 그리 대단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눈빛으로, 옆 창구에 앉아 아마도 푼돈을 저축하고 있는 할머니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나는 말했다.
"네, x만원이요."
찰나에 머릿속에 스친 숱한 계산이 무색하게 직원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종일 돈만 만지는 은행원이 보기에는 얼마 되지 않는 돈일까. 아니면 그도 나와 같은 찰나의 계산으로 이 돈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큰돈은 아니며 누구나의 예금잔고에 그 정도 숫자쯤은 찍혀있는 바, 하등 잘난 것이 없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서류를 작성하는 내내 은행원은 큰 목소리로 내가 가지게 될 숫자를 읊어댔는데 나의 우려와 다르게 작은 은행 안의 그 누구도, 옆 창구 할머니조차도 나를 바라보거나 하지 않았다.
교환의 절차가 끝나자 직원은 숫자가 찍힌 통장과 함께 구포국수 세 봉지와 키친타월 한 개를 선물로 주었다. 마치 내가 배가 고프면 겨우 국수를 삶고, 키친타월로 프라이팬의 기름때를 닦는 일상에 치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라도 하듯이.
나는 들킨 기분이 되어 서둘러 은행을 빠져나왔다. 왜냐하면 진짜 점심으로 은행 옆 가게에서 잔치국수 먹으려고 생각하고 있었음... 맛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