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봄, 친한 동기이자 친구가 우울증으로 회사를 쉬게 되었다.
나는 물가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그녀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그녀는 내 손을 움켜쥐지 않았고, 깊은 심연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만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 나오지 않는다.
가까운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은 모두 가해자였던 것이 된다. 그렇게 되기까지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자책한다. 한편으로는 내 탓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하기도 한다. 동기네 팀의 팀장님은 나를 부르더니 결국엔 자신이 그녀를 위해 기울인 노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업무를 바꾸어 주려고 했다, 팀을 바꿔주려던 참이었다, 그런 묻지도 않은 변명을 한다. 나조차도 스스로를 검열하던 참이라 이해가 갔다.
사람들은 원인을 찾고 그중에서 주범을 찾고 싶어 한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소식을 나에게 묻는다. 옆에서 좀 잘 챙기지 그랬냐고 한다. 나는 딱히 대거리를 하지 않고 그냥 둔다. 그녀의 남편도 이 회사에 있다. 그는 이런 소리를 하루에도 몇 번씩 듣고 있을 것이다. 나보다 더한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이지 손 쓸 틈도 없이 그렇게 빠르게 악화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지만, 그녀는 분명 업무 때문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래서 팀장은 더욱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업무 스트레스로 꽤 오랫동안 밤에 잠을 못 잤고, 자신감을 잃었으며, 불안에 시달린다 하였다. 내가 우울증에 걸려 회사를 쉰다고 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려니 할 테지만, 그녀는 정말 항상 웃고 다니는 밝은 여자다. 매사에 꼼꼼하고 열심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내가 우울증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울함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우울증은 아니었다. 유튜브에서 한 시간짜리 우울증 튜토리얼 영상을 열심히 보았다. 사람들도 우울증에 대해 잘 모른다. 집에만 있어서 답답할 테니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해야겠다는 둥 맥주를 마셔야겠다는 둥 그런 소리를 한다. 집에서 쉬고 있으면 괜찮은 줄 안다. 애들도 봐야 하니 잘 쉴 수나 있겠냐며 걱정한다. 우울증은 그런 것이 아닌 것 같다. 밖에 나와 사람들과 함께 밥을 먹고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면 이미 아픈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녀의 집 앞에까지 가서도 그녀를 보지 못하였다.
나는 한동안 함께 우울했다. 열심히 잘하고 있던 것들, 미라클 모닝이니 영어공부니 명상이니, 그런 것들에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우울하진 않아도 의욕이 생기지 않는 날들이 계속된다.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면서 그냥 하루를 낭비한다. 그렇게 여름도 거의 지났고. 이제야 다시 조금씩 정신이 드는 것 같다. 그런데 그녀는 조금 좋았다가, 많이 나빴다가 하는 것 같다. 내년이나 되어야 회사에 올 것 같다. 한 번도 그녀가 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데, 볼 수 없으니 보고 싶다. 사람이란 볼 수 없어야 보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