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출근 날. 여유롭게 마을버스에 탑승했다. 아파트 정류장에서 회사까지는 마을버스로 약 십 분. 최적의 출근길이 되시겠다. 아침 열 시에 출근해서 오후 네 시에 퇴근, 매해 급여도 오르니 그만한 조건이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었고 그럴 계획으로 입사했다. 임신 후에도 다닐 수 있는 직장, 육아휴직 후 복직할 수 있는 워킹맘을 간절히 희망했다.
그런데 닭장과 같은 근무 환경과 핸드폰 호출, 끊임없이 초대되는 단체 채팅방, 퇴근 후에도 다시 컴퓨터를 켜게 만드는 비상 연락으로 인해 나는 입사하는 순간부터 퇴사를 염원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미어터지게 좁은 공간에서 어떤 놈이 상습적으로 고약한 방귀를 내뿜었는데 그때마다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복도로 뛰쳐나가야 할 정도로 냄새가 역했다.
‘왓 더 퍽!!’ 살면서 방귀 냄새 때문에 그렇게 격노를 하게 될 줄이야. KF94를 가볍게 뚫어버리던 그 냄새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몇 년의 시간을 버텼으나 급여 인상과 재계약을 앞두고 사직 의사를 밝혔다. 상사분의 첫마디는 “절대 안 돼요.”였다. 회사에서는 감사하게도 더 좋은 조건들을 약속하며 계속 함께 일할 것을 부탁했지만 내 결정은 확고했다.
“여보. 나 회사 그만 다니고 싶어.” 퇴사해도 되냐는 물음에 남편은 슈퍼맨처럼 이렇게 답했다.
“하고픈 대로 해. 뭐가 걱정이야. 내가 있잖아.”
늘 내 편이 되어주는 반려자 덕분에 어찌나 감사한지. 예상은 했지만 아주 흔쾌히 퇴사를 권하는 남편의 대답을 들으니 오히려 ‘괜한 결정을 했나.’라는 미안한 마음과 아쉬움이 앞섰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글이 아닌 숫자와 싸우는 일은 나와 맞지 않았다.
냉장고에 퇴사 디데이 백일 달력을 붙여놓고 매일 날짜를 하나씩 지워나가며 출근했다. 퇴사일이 정해지니 회사에 나가는 것이 더 강력하게 싫었다. 시계가 멈춘 듯 느껴지는 인고의 나날들이었지만 치밀하게 인수인계를 하고 꼼꼼하게 업무를 마무리했다.
드디어 디데이가 되었고 차기 담당자에게 모든 업무자료를 복사해 둔 외장 하드를 건넸다. 그리고 내 개인 컴퓨터와 핸드폰을 잠식하고 있던 업무 파일들과 단체 채팅방들을 모조리 삭제했다.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심정을 만끽하며 지우고 또 지웠다.이제 진짜로 안녕.
내가 포기한 것은 소정의 월급이었는데 퇴사를 통해 얻은 행복의 가치는 몇 배였다. “요즘 너무 행복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자 그동안 실패했었던 임신 문제도 단숨에 해결될 듯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 편하게 지내. 지금 우리 부부에게 아기를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남편도 즐겁게 잘 지내는 내 모습에 덩달아 힘이 난다고 했다. 퇴사를 기점으로 우리 부부는 난생처음 난임병원 진료를 예약했다.
날이 화창한 이른 아침에 난임병원에 가기 위해 남편의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진료 마치고 뭐 먹을까,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 우리도 이제 진짜 아기가 생기겠지? 희망으로 가득 찬 대화를 나누며 좋아하는 노래도 들었다. 소풍 가듯 난임병원으로 룰루랄라.
어렸을 때 부모님이 손만 잡고 자도 아기가 생기는 줄로 알았던 것처럼 난임병원에 가면 우리도 금세 아기가 생길 거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