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우리 삶에 반려견은 없으리라확신했다. 팻로스의 슬픔에 대해 우려해 왔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아픔이었다. 두 번은 당해낼 수없는 큰 상실감이라 말하겠다.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자두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남편 역시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자주 울었다.
팻로스를 겪는 사람들이 가장 그리워하는 건 반려동물의 '온기'이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따스한 기운.
예쁜 눈망울과 두근거리는 심장, 조금이라도 더 곁에 있으려고 엉덩이를 바짝 붙이고서 온몸으로 사랑을 말하는 존재의 부재. 자두의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울지 고심하며 연구하는 요즘이다.
길을 걷다가 자두를 닮은 강아지를 만나면 모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며 자연히 마음이 간다. 네 발 달린 동물이 보이면 일부러 방향을 틀어서라도 가까이 다가가는 작전을 펼치기도 한다. 우호적인 반려견 주인을 만나서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 "감사합니다. 안녕. 잘 가." 멀어지는 귀여운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반려견 없이 살 수가 있겠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도저히못 살겠단 심정으로 몇 차례 팻샵을 방문하기도 했다. 한 번은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잽싸게 달려와 우릴 반겼다. 몸을 비비고 얼굴을 들이밀며 오랜 친구처럼 격정적인 인사를 건네는 녀석의 애교에 모든 근심이 사르르. '인생 뭐 있냐.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반려견 없이 살아!'
강아지 식구를 맞이하고 싶어서 여러 길을 모색했다. 유기견, 파양 당하는 반려견들의 정보를수소문하기도 수차례. 파양 된 반려견을 키우며 즐겁게 지내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유기견이었던 강아지가 자주 아파서 걱정이 많다는 분의 이야기에 두려움이 앞서기도 했다. 파양 당하는 강아지를 데려오기 위해 몇 차례 주인에게 연락을 취한 적이 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자두가 우리에게 올 때 그러했듯이 거부할 수 없는 인연이 닿으면 그땐 모든 곁을 내어주리라.
다신 반려견을 키우지 않겠다는 다짐의 농도가 점점 묽어진다. 혹시라도 다시 강아지를 키우게 된다면 분리불안이 심하지 않고 다른 강아지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는 아이라면 좋겠다. 아니. 다 됐고 건강만 하면 좋겠다. 그러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저녁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말했다. 나란 사람은어떤 강아지를 데려와도 자두보다 더 아끼고 예뻐하면서 키울 것 같다고. 나는 이렇게 답했다. "어떤 강아지를 키운다 해도 자두보다 더 예뻐할 순 없겠지. 그래도 자두만큼은 사랑해야지." 그 대답을 하는데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더는 슬픔만 담겨 있는 눈물이 아니었다. 자두가 구름 이불을 덮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두를 향한 고마움, 치유, 희망의 기운이 우리의 꼭 잡은 손을 비추었다. 다신 강아지를 안 키우겠다던 다짐은 '기회가 되면'으로 바뀌었다.
기적 같은 변화와 용기의 시작이다.
건강을 해칠 정도로 강력했던 슬픔도 시간이 지나니 견뎌지는구나 싶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참으로 얄궂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