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양평살이
양평에 산다고 하면 “ 전원주택 사시는구나!”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마다 “아니요, 저 빌라 살아요.”라고 말하며 이 동네에 있는 고급 전원주택에 내 이미지가 겹쳐질 까봐 손사래를 쳤다.
양평 읍내, 삼십 년 된 빌라, 그곳에 월세를 살뿐인데 다르게 보는 게 부담스러웠다.
결혼 전, 남편은 양평에 땅을 샀다. 500평,
보러 간다더니 샀다고 했다. 옷을 살 때도 네다섯 번씩 입어보는 사람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더 고민하면 수도권 밖으로 가야 될 거 같아 서둘렀다고 했다. 남편이 원래 지내던 작업실은 신도시 개발지역으로 정해져 곧 비워야 했다.
그리고 곧, 산 땅에 작업실을 지을 예정이었다. 들어가는 길을 추 후 내주는 조건으로 싼 값에 산 땅에 길이 나는데 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생각 없이 지나던 길에도 주인이 있다는 것을 여기 와서 처음 알게 됐다. 길이 생겼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길마다 주인이 있듯이 땅마다 용도가 있고, 할 수 있는 행위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덧 우린 이곳에 이렇게 사는 것에 아무렇지 않게 적응했고, 바쁜 것을 핑계로 이곳에 무엇 때문에 이사 왔는지는 기억에서 물러났다. 몇 년에 한 번씩 땅에 가서 참았던 한 숨을 내 쉬고 다시 돌아왔지만, 금세 잊었다. 잘 못 된 선택에 대한 후회를 잊는 것으로 얼버무렸다.
작업실을 짓는 동안 1~2년 정도 지내려고 얻은 집에서 딱 10년을 살았다. 낡았지만 아늑한 남향이라 해가 잘 들고 기차역과 시장, 마트가 가까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월세가 쌌다. 그리고 십 년 동안 한 번도 세가 오르지 않았다. 낯 선 곳에서 지내기 위해서인지, 합리화인지 모르지만 나도 모르게 이곳의 장점을 찾고 위안을 삼았다.
집 근처 걸어서 갈 수 있는 폭이 넓은 강변의 산책로는 정말 매력적이었다. 벚나무와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우거져 있었다. 산책도 하고 자전거도 탈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경한 지역으로의 이주가, 또 결혼이라는 낯선 시작에 위로가 됐다.
딱히, 갈 새는 없었다.
결혼 후 3년 동안 서울로 출퇴근을 했다. 야근도 잦았고 출장도 잦았다. 막차를 타고 부랴 부랴 들어와 잠을 자고 또 나갔다. 캐리어에 꾸린 짐은 반 만 풀러 빨래가 끝나면 도로 싸서 집을 비웠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늦깎이로 다시 공부를 하고, 원해서 시작했던 전시 기획일이지만, 6년 정도의 시간 동안 경험이 쌓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보다는, 스스로가 낡아지는 느낌이 점점 커져 만 갔다.
‘나는 왜 여기 있는 것일까?’
이곳에 살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은 어정쩡한 상태. 그게 내 포지션이었다. 귀농도 아니고 귀촌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원을 만끽하는 여유로움도 없었다. 잠만 여기서 잘 뿐, 결혼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애매한 포지션, 이곳에 사는 나도, 하고 있는 일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마저도, 모든 게 그렇고 그런 상태라 느꼈다. 밤을 새우고, 간발에 차이로 마지막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지하철을 탔다. 기차로 삼십 분이면 침대에 누울 수 있는데 한 시간을 넘게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한다니까 억울했다. 서울을 벗어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눈꺼풀이 따가웠다. 서서는 그렇게 졸리더니 앉으니까 잠도 안 왔다. 컴컴한 밖을 내다보았다. 밖은 안 보이고 유리창에 내가 보였다. 후줄근했다. 춥다고 가방에서 꺼낸 머플러처럼 구겨져 있었다. 갑자기 나는 누구인가 이런 말을 속으로 떠올렸다.
벼 껍데기 같았다. 알맹이가 하나도 남지 않아 불면 호로록 날아가 버리는 벼 껍질.
잘 자고 일어나면 나는 누구인가 따위는 궁금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언제인가 부터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좀 쉬면서 하고 싶은 것을 잘 찾아보라 던 남편 말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렇다고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은 아닌데. 왜 자꾸 지쳐 나가떨어지는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졸업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전시 기획일로 전업을 하고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했다. 잘하고 싶었지만 마음만 앞섰다. 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시간으로, 몸으로 억지로 때우고 있었다.
정말 좋아하는 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으나, 우선 좀 자고 싶었다.
하루를 꼬박 잤다.
회사에 이 번 달까지만 일하겠다고 말했다.
일어나니 베란다로 이어진 오후 볕이 마루 끝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물끄러미 장판 위에 피워 오르는 아지랑이를 바라보았다.
서른 언저리에 어렴풋이 눈치를 챘는데 은근슬쩍 넘어갔다. 유보해 둔 고민이 다시 발목을 잡는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얼렁뚱땅 넘기지 말고, 제대로 알고 싶었다.
나는 누구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