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향숙 Mar 15. 2023

2. 나는 누구인가?

- 마흔이 코앞이었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일을 그만뒀다. 이직 계획 없는 퇴사였다. 퇴사 덕분에 알게 된 것은 쉬고 노는 게 뭔지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놀아 본 적이 딱히 없었다. 어떻게 노는 건지, 쉬는 게 뭔지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마감을 하거나 준비했던 행사의 오프닝이 열리면 밀리고 쌓인 육신의 고단함을 폭탄주에 말아먹고 자는 게 쉬는 건 줄 알았다.


그만두고 집에 있던 날

“오늘 뭐 했어?” 상냥하게 묻는 남편에게 “아무것도 안 했어! 왜?” 돼 물었다. 좋게 되물은 것은 아니다. 그냥 묻는 말이었을 뿐인데, 그 말이 질책으로 들렸다.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모두가 일 하는데 나 혼자 의미 없이 빈 둥 거리는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을 넘어서서 밑도 끝도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라는 물음에 대한 정답을 딱 내놔야 할 것 같았다. 빨리 내놔야 될 거 같았다.


불안함이 엄습했다.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지금의 나란 인간에 대한 진실을 알고 났을 때, 실망할 거 같았다. 생각만 해도 싫었다. 이 상황을 살짝 외면했다가 조금 더 괜찮은 인간 일 때 나를 발견하고 싶었다.


결국, 삼 개월이 안 돼 도망치듯 동네 디자인 회사에 취직을 했다. 한적한 시골 회사에서 적당히 일 하고 적당이 벌며 무능한 사람이라는 죄책감도 걷어 내고, 나를 찾는 시간을 미뤄 볼 요량이었다. 꿈이 야무졌는지 작은 회사는 일이 넘쳤다. 일은 있는데 일할 사람이 없었다. 한 달을 꼬박 야근을 해도, 관광지로 유명한 동네는 달마다 축제와 행사가 이어졌다. 마음 따위는 챙겨 볼 틈 없이 시간을 흘러 보냈다. 몇 달 전에 고민하던 나는 누구인가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점심시간에 회계일을 보던 띠 동갑 언니와 동네 맛 집으로 밥을 먹으러 다니는 게 낙이었다. 20년 남짓 이곳에서 산 언니는 ‘동네 사람 만’ 안다는 곳을 알려주었다. 3년 동안 살면서 가본 적 없는 현지 맛집이 내게도 생기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주중에 맛있던 집을 골라 남편과 갔다. 언니가 말해 준 근처의 동네 사람만 안다는 한적한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놀았고, 모르고 있던 지역 주민 무료입장이 되는 관광지에서 주민등록증 만 내밀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정쩡한 사람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료로 입장 한 조용한 숲을 걷고 있으면 미뤄둔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지만, 서둘러 지웠다.


일이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그날그날 처리한 일들이 까맣고 빨간 글씨로 빼곡히 채워진 다이어리를 옆에 두고 내 것도 아닌 일에 뿌듯해했다. 뒷 방으로 물러난 상궁마마가 된 거 같은 느낌이 엄습할 때도 있었다. 시골 회사의 에이스와 도시에서 밀려난 루저 사이에서 시소를 타고 있었다. 루저가 슬며시 고개를 들면, 채워지지 않는 것을 엉뚱한 것으로 때우려고 했다.


‘거위 가슴털로 만든 고급 호텔용’

한 달 치 야근 수당을 베개에 꼬라박았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물건이었다. 높고 푹신한 베개는 불편했다. 호화스럽게 금색 글씨로 ‘삶의 질’을 운운하는 문구에 금세 현혹 돼 결제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베개를 베고 자지도 않으면서 대체 이 건 왜 산 걸까?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뭘까? 내가 좋아하는 게 뭘까?

유보해 두었던 질문은 밤이면 옆구리에서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잠을 거둬 갔다. 짐작했던 것처럼 베개 따위로 삶의 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돈이 아까워 꾸역꾸역 베고 잔 베개 덕분에 목에  담이 왔다. 뻣뻣 해 진 목으로 일찍 출근을 했다. 책상 위에 다이어리를 넘겼다. 빼곡 한 글씨 사이에 나는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마흔이… 코 앞이었다. 뭔가 됐어야 했다. 뭐라도! 이룬 게 있어야 할 시간 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뭐가 되고 싶은지 명확히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낙오자 취급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심장이 요동치는 밤을 보내는 날이 지속됐다. 출근길에 터질 듯 두근대는 심장을 붙잡고 병원에 갔다. 엑스레이 초음파 심전도를 했지만 모든 수치가 정상을 가리켰다.

병원 대신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봤다. 화병이라고 했다. 어이없었지만 안 그런 척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거울 속 내가 뵈기 싫어 한 동안 거울을 보지 않고 지냈다. 한의사는 진짜로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라고 했다. 미움이 싹텄다. 모두가 잘 넘기는 시기를 기어코 앓고 마는 내가 반푼이 같아 미웠다. 모르는 척, 찾는 척,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땅 때문에 발이 묶였다고 생각한 시간에 너무도 익숙 해 졌다. 이렇게 주저 않듯 계획했던 것들을 수포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고민 끝에 용도에 맞는 땅을 ‘다시’ 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땅을 내놨고 부동산은 잠잠했다. ‘경기침체 장기화’ 이런 말들이 뉴스에서 흘러나왔다.


무얼 찾는지도 모르는 채 시간은 잘 도 흘렀다.


계곡의 엉킨 가지들 사이에 산란한 마음을 얹어두었다.


이전 01화 1. 귀농 아니고, 귀촌 아니고, 시골 삽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