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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향숙 Mar 15. 2023

3. 올 해는 너를 빼고 다 바꿀 예정이다.

미납 고지서 같은 시간


엄마가 쓰러졌다. 

뇌종양 말기, 평균 일 년 육 개월 시한부, 그 사이 상태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의 수술에도 정해진 시간은 바뀌지 않을 듯 보였다. 울려는 애 뺨 때리는 듯이 회사를 관뒀다. 얼마 남지 않은 엄마의 시간에 곁을 함께 하고 싶었다. 폭풍 같은 일 년을 보냈다.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식구들은 최선을 다 했다. 그럼에도 엄마의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엄마를 돌보고 일 이주에 한 번씩 양평 집에 와서 하루 자고 간략히 살림을 살고 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빠는 망연자실했고, 동생도 위태로워 보였다. 맏이 인 내가 무너지면 식구들도 무너질 거 같았다.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절박했다. 미뤄둔 속내도, 끝까지 내달리는 상황 속 현실도, 허우적거리던 힘도 남아 있지 않아 간신히 숨만 쉬는 것 같았다. 

동생과 병원서 교대하고 집에 돌아온 날 남편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 주전 마시다 남은 소주 반 병을 냉장고에서 느릿느릿 꺼냈다. 얘기가 듣고 싶기도 했지만 그냥 눕고 싶기도 했다. 

“올해 너를 빼고 다 바꿀 예정이야” 

자세히 묻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구태의연한 문장 안의 명확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 그러자!” 내가 오늘 쓸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담아 남편에게 말을 건넸다. 

응원하고 싶었다.


숨죽여 기다리던 시간이 한꺼번에 미납고지서처럼 밀려왔다.

‘이제 그만 움직여!’라는 신호처럼 오래된 집과 차는 버티기 힘들다는 것을 증명하듯 여기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나처럼,

시간에 이끌려 내달리다 보니, 책 제목처럼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어 있었다.


지친 마음 때문인지, 남편의 결심에 의지 해 끌려가고 싶었다. 그 끝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갈 수 만 있다면 가보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십 년 내내 말만 오가고 조용했던 이곳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몇 년째 아파트가 들어온다고 소문만 무성하던 곳에 드디어 건설회사 로고가 크게 박힌 가로막이 설치되고 부지가 조성 됐다. 유명 연예인의 강이 보이는 호젓한 집이 TV에 소개될 때면 어김없이 양평이었다. 몇 년 사이 양평의 분위기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부동산에 땅을 다시 내놨고 살 땅도 알아봤다. 엄마를 돌보는 동안 남편은 부동산을 훑었다. 그렇게 주 중에 몇 개의 땅을 보고 양평에 오는 날에는 그중에 괜찮은 땅을 함께 둘러봤다. 


같은 가격에서 읍내와 가까운 작은 땅이냐, 멀지만 넓은 땅이냐에 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몇 년간 고심은 좀 더 외곽의 넓은 땅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먼 곳으로 결정한 데는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를 매일 오고 가는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의 소란함도 한몫했다.


양평 끝, 강원도와 맞닿은 동네, 매서운 겨울은 지났지만 그 겨울보다 쓸쓸한 시간, 저 끝 산자락 밑은 낮인데도 그림자가 그득했다. 굽이진 길을 여러 번 돌았다. 황량한 계절이 내 마음 같아 편안했다. 그제야 남편의 결심이 궁금 해졌다. 

“ 그런데 왜 갑자기 다 바꿔버릴 생각을 했어? 아니, 갑자기는 아니다.”

“ 응, 더 늦으면 안 될 거 같아서, 어머니가 저렇게 계시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드네” 


울컥, 목구멍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들었다. 

언제나 시기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보지만, 그 순간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능수능란 한 타입의 인간이 아니다. 고심했던 결과가 좋았던 것도 아니다. 무거움과 가벼움 사이에서 그만 갈팡질팡 하고 싶었다. 그만해야 했다. 


사실, 그동안 건성건성 따라다니는 시늉만 했었다. 창밖을 보고 멍 때리다 내려서 땅 보고, 그냥, 보라니까 보고… 

묻어가려는 마음을 들키지 않고, 어떻게든 새로운 곳에 노력 없이 안착하고 싶은 마음이 한쪽에 도사리고 있었다. 

겨울보다 메마른 봄 언저리, 땅 끝을 오가며 진지하게 땅을 보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어렵게 먹은 마음이었다. 

절대로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를 떠올렸다. 


움직이지 않으면 타이밍도 오지 않는다. 


“오빠, 이 땅은 아닌 거 같아.”

몇 주 만에 처음으로 입을 떼고 의견을 말했다. 


“아닌 거 같아?” 코를 훌쩍이며 입김을 뿜는 남편이 내쪽으로 걸어왔다. 본 땅에 대해 구체적인 느낌을 자세히 남편에게 읊었다. 나의 성의를,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이렇게 시작해 보자.  움직이지 않으면 타이밍도 오지 않는다. 익숙한 문구를 떠 올리며, 망설이다 미뤄 버린 시간을 조금씩 떨궈냈다.

병원에서 교대하고 양평에 도착하면 가끔 강가까지 걸어가 해가 질 때까지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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