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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줍어도 수영장에 갑니다>다른얼굴로 수영장에 가고싶어

말 걸지 말아 줘요, 아는척하지 말아 줘요, 뷰티인사이드, 물속이 안전해

by 산책이

재밌는 상상을 해본다.


영화 뷰티인사이드의 주인공처럼

매일 다른 얼굴로 수영장에 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정말 즐겁게 수영장에 다닐 수 있을 텐데.


나는 원래 수줍음이 많다.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해왔는데도

여전히 등을 지고 앉는 코너자리를 선호하고

엘리베이터에 누가 같이 탈 것 같으면 종종걸음으로 계단으로 돌진한다. 그게 마음이 편하다.


일터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면

퇴근 후에는 말수조차 줄이고 싶고, 더 이상의 사회생활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에너지 충전이 되지 않고 방전이 된다.


하지만 저녁식사 후 수영장에 매일 가은 시간에 가다 보면 자연스레 낯익은 얼굴들이 생긴다.

이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내가 그들을 알아보는 것처럼 그들도 나를 기억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익숙함이 은근히 신경 쓰일 때가 있다. 물론 그 사람들이 모두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냥 조용히 수영만 하고 싶을 뿐이다.


혹시 누가 인사를 할까 봐, 누가 말을 걸까 봐 그래서 괜히 관계가 시작될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온다.

설레발이다.


그러나 이 설레발이 결국 현실로 이뤄지는 경우도 생겨 문제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가장 쉽고도 어려운 건 안 쉬고 계속 레인을 도는 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폐활량이 내가 원하는 만큼 따라오지 않는다.


그래서 문득 상상했다. '매일 다른 얼굴로 수영장에 가고 싶다.'

그러면 괜한 설레발로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텐데.

그리고 오직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텐데.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이런 상상까지 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경험 때문이다.

느닷없이 수영 훈수를 두는 사람, 텃세처럼 불편한 말을 쏘는 사람, 정말 아는 척하기 싫은데 검은 얼굴로 마주칠때마다 말 거는 아저씨 등 지금도 그런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하니라 마음이 힘들다.

심지어 나는 수영 강습을 듣지도 않는데 말이다!


물론 따뜻한 순간도 있었다. 예컨대 샤워실에서 누군가 내 수영복 뒤 끈이 꼬여 있는 걸 보고

"혹시 도와드려도 될까요?"하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 적이 있다.

그 배려는 오히려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배영을 하며 천장을 보고 딴생각을 하다

수영장 벽에 머리를 쿵하고 박았을 때

괜찮냐고 물어봐줬던 아주머니도.


좋은 경험과 불편한 경험이 뒤섞인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생각한다.


'얼굴을 바꾸고 수영장에 가고 싶어'


상상만 하다 결국 나는 폐활량을 늘리기로 결심한다.

그래! 쉬지 않고 레인을 돌자.

역시 수줍은 나에겐 물속이 가장 안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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