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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D-120> 평소 안 쓰는 손으로 글씨

one day one me、 왼손 필사、 릴케、 인생

by 산책이

평소 안 쓰는 손(왼손)으로 글씨 써보기


2025년 다짐 중 하나는

꾸준히 왼손 필사를 하며 평소 잘 쓰지 않는 손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 전에도 왼손으로 밥을 먹거나 양치질을 하는 등

일상 속 작은 습관을 들이려 했지만, 번번이 결심은 흐지부지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꼭 성공하겠다는 다짐을 응원하듯,

올해 초 서점 매대에는 다양한 필사책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나는 여러 문학 작품 속 글귀 100개를 담은 노란색 필사책을 골랐다.
365일 매일 써야 하는 것도 아니고, 약 3개월 분량인 100개라면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9월인 지금, 아직 100개를 다 채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벌써 82일차까지 왔으니, 끝이 눈앞에 보인다.


매일 습관처럼 왼손 필사를 하고 잠들고 싶지만,
생각보다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은 많은 시간과 정성을 요구한다.

오른손에 익숙하다 보니 왼손으로 연필을 잡으면 괜히 힘이 잔뜩 들어가고,
힘을 빼면 글씨는 삐뚤빼뚤 지렁이가 미끄러지듯 흐트러진다.
결국 적응될 때까지는 힘을 주어 연필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 획 한 획 집중하지 않으면 글자의 모양과 선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굉장한 집중력이 필요했고,
천천히 써야 하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오직 마음에 여유가 생긴 밤에만 필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2025년에 여유로운 밤을 겨우 82일 정도 가진 셈일까?


오늘의 미션은 여유롭지 않은 순간에 잠시 명상하듯 수행되었다.

오늘 마주한 시는 릴케의 <인생>.



“인생은 꼭 이해하지 않아도 괜찮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시는, 묘하게도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나는 늘 내 인생을 이해하고 싶었다.
의미를 찾고 싶었고,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 의미 없이 부딪히는 일이 있고, 이유 없이 불쑥 다가오는 일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여전히 쉽지 않다.

재앙처럼 들이닥치는 고비를 마주하다 보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가도,
동시에 지금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한 마음이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

산책하던 아이가 바람에 실려온 꽃잎을 선물처럼 받아들이듯,
나도 그렇게 살라니.
그 꽃잎을 나는 언제, 어디에서 마주하게 될까.


시는 어렵다.
그렇지만 짧기에 금세 읽을 수 있고, 곱씹다 보면 내 상황과 맞물려 생각하기도 쉽다.

하루하루 있는 그대로 살아가며,
one day one me를 12월 31일까지 끝까지 잘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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