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우 Jul 12. 2023

8월,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던데

새 가족, 그리고 새 학교

미국에 가기 전에 많이 들어본 말,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고 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 일상의 소소한 재미, 떡볶이 먹고 노래방 가는 그런 재미는 없다. 그리고 여유 있고 자유롭다고 천국이라고 불린다는데... 그건 정말 큰 착각이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감성에 젖어 떠오를 때와는 달리 신나게 영화를 보고 기내식을 먹었다. 당시 새로 개봉했던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틀었는데 때마침 난기류를 만나 4D 영화처럼 즐긴 기억이 있다. 열네 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착륙한 곳은 텍사스 주였다. 내가 가는 곳은 미국의 시골이라, 한 번 경유해서 갈 수 있는 것도 행운이었다. 달라스 공항에서 '외국인이 진짜 많다...' 하다가, 곧 내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말로 영어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게 1차 충격, 인종이나 외모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한 게 2차 충격이었다. 

한참 기다렸다가 캔자스 주 위치토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호스트 가족을 만날 생각에 들뜨기도, 긴장되기도 해 가슴이 두근거리는 한두 시간이었다. 


처음 캔자스에 발을 디뎠을 때, 연체동물처럼 다리가 떨렸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살겠다고 했는지 후회하며 느리게 걷는데, 공항이 작아서 금방 게이트의 끝에 다다랐다. 저기 앞에 내 또래 금발 여자애와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애가 있었다. Welcome to the USA라고 쓰여 있는 큰 포스터를 들고. 사실 난 그런 걸 굉장히 부담스러워해서 고맙기도 한데 꽤나 민망했다. 

"안녕? 너 혹시...?"

"어.. 내가 지우..."

"맞는구나! 반가워!"

머릿속으로 인사말을 열심히 연습해 왔는데 막상 나오는 말은 Hi 뿐이었다. 영어를 나름 잘한다고 생각했음에도 완전히 영어에만 둘러싸여 있는 것은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었다. 여자애는 케이티, 남자애는 토미. 호스트 엄마와 아빠는 여행을 떠났다 내 다음 비행기로 들어온다고 했다. 오케이 오케이 밖에 못하고 어색한 정적 속에 캐리어를 찾으러 가는데 케이티가 말을 걸었다.

"난 운동하는 거 진짜 좋아하고, 아 넌 뭐 좋아해?"

일단 운동은 정말 싫다.

짧은 순간에 많은 생각이 스쳤다. 책 읽기를 좋아한다고 할까? 너무 모범생 같은가? 애초에 내가 책 읽기를 진짜 좋아하는 게 맞나? 음악 듣기는 다들 좋아하는 거잖아. 등산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걸 떠올리는 게 아닐까? 운동이 좋다고 해야... 아니지. 거짓말은 좀 그래. 그런데, 나 왜 뭘 좋아하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있지? 

"I like... reading?"

"Oh okay."

대화는 거기서 뚝 끊겼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호스트 엄마 아빠는 케이티, 토미와 인사를 나누고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은 제니와 앤드류. 이름으로 편하게 부르라는데 한국인의 유교 정신으로 용납하기 정말 힘들었다. 집으로 가는 옅은 회색 미니밴에 올라 약 15분을 달렸다. 어색한 공기를 풀어주려고 내게 계속 말을 거는 앤드류가 고맙긴 한데, 덜컹거리는 소리 때문에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초긴장 상태로 의자 끝에 걸터앉아 있다가, 질문하는 순간 거의 반사적으로 입이 움직였다. 뭐, 대답을 잘했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다.


앤드류의 질문 공세가 이어지는데 한국과 나에 대한 얘기가 많았다. 무엇보다 익숙한 것들이어야 하는데 정작 내 대답은 뚝뚝 끊어지고 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내가 생각보다 우리나라도, 나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구나 하고 실감했다. 아무래도 앞으로의 열 달이 순탄하진 않을 거 같다고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이전 08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작별인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