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남편과 결혼, 산동네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 나는 결혼 6년 만에 경기도 외곽에 작은 우리 집을 마련하였다. 하루 서너 시간의 출퇴근으로 매일 녹초가 되곤 했지만 주말마다 요리실력이 뛰어난 남편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어여쁜 삼 남매, 시어머님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세월이 지나 서울의 아담한 아파트로 이사하여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할 때 즈음 남편이 회사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남편은 불가피하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우리 가정에 먹구름이 뒤덮이는 어둠의 서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상하게 몸무게가 자꾸 빠지네…?”
2011년 청명한 10월의 연휴 첫날 아침, 몸무게를 재던 남편이 던진 한 마디였다. 나는 갑자기 지난밤 꾸었던 악몽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남편은 누구인지 모를 채권자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시어머니와 나는 두려움에 떨며 남편이 그들에게 잡힐까 전전긍긍하는데 피해야 할 남편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고 문 쪽으로 그들이 더욱더 가까이 다가오는 꿈이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직감이 느껴졌지만 남편에게는 건강진단을 한 번 받아보라고 가볍게 말하며 그 길로 조카가 근무하는 병원에 건강검진 예약을 진행했다. 검진 직후 나의 휴대전화 벨이 울리며 조카의 이름이 뜨는 순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우리의 삶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결과는 위암 초기. 사업가적 자질이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가피하게 선택한 길이었기에 처음부터 힘에 겨운 싸움이었다. 게다가 당시 IT 업계가 더욱 열악해지는 상황이라 남편 사업은 한 번도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기울어 갔다. 기울어 가는 사업을 살려보려고 애쓰는 가운데 스트레스가 겹치자 결국 암에 걸리게 된 것이다. 다행히 조기 발견되었으므로 위암 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나는 전남 장수까지 내려가 암에 좋다는 약초를 캐 오는 등 남편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수술 후 회복과정에 있을 때 남편의 사업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그 해 겨울, 남편은 결국 두 손을 들고 사업을 포기해야 할 단계에 이르렀는데 문제는 수 억 원에 달하는 빚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최대한의 생활비를 줄이고 이자를 감당해야 하는 역할을 본의 아니게 떠맡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 아이들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다니던 시기였다. 시어머니는 치매기로 요양원에 입소하시게 되었고 가정의 존립 자체에 위기가 닥친 것이다. 아이들의 등록금, 학원비, 시어머니 요양비용, 생활비 게다가 대출 이자 등 끝을 모르는 경제적 위기가 밀려들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장기 교육을 끝내고 대기 중이었던 내가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남편이 암에서 완치를 받은 것도 아니고 막내 아이는 고2, 곧 입시 생활을 해야 하며 큰 아이 둘은 대학생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나는 지방에 근무하며 모든 것을 다 감당해야만 했다. 이 같은 삶의 위기 가운데 내가 기댈 곳은 오직 기타, 그리고 노래였다.
지방에 근무하며 퇴근 후 혼자 현관문을 들어설 때 내 마음은 항상 천근만근이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한 위안은 음악뿐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적막한 밤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일뿐이었다. 그럴 때만이 암담한 현실을 잊게 해 주었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지방에서도 퇴근 후 일주일에 한 번 기타 학원을 다니며 그동안 배웠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다시 한번 느낀 것이 음악이 주는 치유효과가 정말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나는 음악으로 위안을 얻으며 외롭고 추웠던 1년간의 지방 근무를 마치고 다시 서울로 복귀했다.
음악의 치유효과 - 새로운 꿈을 꾸다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었어도 우리 가정의 여러 가지 어려움은 그대로였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나 혼자 아이들 셋의 교육이나 남편 사업실패로 인한 부채 문제, 함께 사시던 시어머님 건강문제 등 크나 큰 집안 대소사를 어떻게 감당하며 살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답이 있다면 앞서 말한 음악의 치유효과 즉 기타, 노래와 함께 했기에 힘든 상황을 힘든 줄 모르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된 그날부터 내 마음속에 새로운 꿈 하나가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음악의 치유 효과를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또한 퇴직을 1년여 정도 남겨 두게 되었을 때 나는 그동안 살아가기에 바빠 수십 년간 잊고 살았던 그림을 떠올렸다. 나에게 미술이 어떤 의미였던가. 어린 시절 감당하기에 힘들었던 현실 속에서 유일하게 나의 자존감을 지켜 주었던 그림. 남은 인생, 음악도 좋지만 그림도 함께 하며 살아가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
생각과 동시에 미술 학원을 알아보고 실행에 옮겼다. 미술학원에 처음 등록할 때부터 나는 미술을 취미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즉 퇴직 후 남는 시간을 죽이기 위한 단순 취미가 아니라 이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 추구해 나갈 나의 목표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미술학원에서 처음으로 연필로 줄 긋기를 시작했을 때, 드로잉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내 작품을 남들의 멋진 작품과 비교해 보며 혼자 얼굴을 붉힐 때, 수채화를 그리기 위해 물과 씨름할 때마다 수시로 마음이 흔들리곤 했다. 내가 감히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했던 사실이 너무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마음속에 새로운 꿈을 갖게 된 나는 마치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밤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매일 거르지 않던 일기에 구체적으로 나의 퇴직 후의 꿈을 써내려 가기도 했다.
우선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나만의 공간. 그 작은 공간을 “미사랑”이라 이름 지을 것이다. “아름다음을 사랑하는 공간”도 될 수 있겠고 “나(경미)의 사랑방”이라는 의미도 될 수 있겠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인생의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기타를 가르치며 음악의 치유효과를 공유하리라.
수년 전 내가 직장에서 승진을 하며 보직을 이동하게 되었을 때 기존에 함께 근무하고 있던 직원들이 승진을 축하하는 작은 기념패를 만들어 준 적이 있었다.
“함께 한 시간, 큰 기쁨으로 결실 맺음을 잊을 수 없어 라일락처럼 향기로웠던 우리의 추억을 담아 전합니다. 그대 앞날에 영원한 BRABO! - 美사랑 일동 -
기념패 내용도 너무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무엇보다 -美사랑-이라는 글귀에 꽂혔었다. 미사랑…. 그래 바로 이것이다! 그 후로 미사랑은 나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쓰였다. 몇 년이 지나 정식으로 회사를 퇴직하게 되었을 때 나와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다시 감사패를 만들어 주었다.
“30여 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눈부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당신께 존경의 박수를 드립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우리는 매일매일 행복했습니다. 당신의 앞날에 영광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 美사랑 직원 일동 –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꿈은 이루어진다. 그 누구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앞만 보고 나아가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어린 시절은 물론 내 나이 쉰 살이 훨씬 넘어 새롭게 꾸었던 꿈들이 거의 모두 현실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나는 젊은 청년들은 물론, 이 글을 읽는 중년 이상의 많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꿈을 꾸며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렇게 작던, 크던 꿈을 꾸며 앞만 보고 걸어가다 보면 어느 날인가 그 꿈이 현실이 되어 바로 그대 앞에 나타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