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50년 어간을 살다가 남편의 직장문제로 이곳 순천으로 이사 온 지 벌써 9년째다. 복잡한 서울에 살다가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에 오니 낯설고 갈 곳도 마땅치 않아 어떻게 적응을 해야 할지 몰라 힘들었다. 그러던 중에 한 가지 생각해 낸 것이 멀리 있지 않은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것과 섬진강 어귀를 따라 자전거를 타는 일이었다.
서울에 있을 때는 거리가 멀어 이곳에 한번 오는 일이 쉽지 않았는데 이참에 이곳 주변을 살뜰히 누려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정보를 얻고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에 용기를 내어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 길은 구례의 예술인 마을이 있는 광의에서 시작하여 오미까지 걸었다. 그렇게 시작한 지리산 둘레길 걷기는 2년에 걸쳐 완주를 할 수 있었다.(1년 코스인데 중간에 참여하여 다시 처음 구간도 걸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을 둘러싼 남원시,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285km로서 22개 구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구간에서 다음 구간까지는 가까운 거리는 10km 이내고 먼 거리는 20km 안팎이다. 둘레길을 걷는 일은 가파른 고개를 넘기도 하고 호젓한 숲 속길을 콧노래 부르며 걷기도 하고 잘 익은 벼들이 고개 숙인 황금 들판을 지나기도 하며 지루한 자갈길을 걷는 일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 마을마다의 다양한 집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나름 쏠쏠하다.
이렇듯 봄에는 꽃들과 인사하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든 지리산의 고즈넉함에 깊이에 빠져들 수 있다는 건 지리산 가까이 사는 이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렇게 시간 될 때마다 지리산의 한 구간 한 구간을 정복하면서 나 자신을 칭찬했다.
‘오늘도 잘 걸었어. 오늘도 멋졌어’
그런데 여자인 내가 혼자 걸으면서 뱀이나 멧돼지 산짐승들에 대한 두려움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찾아낸 것이 사단법인 「숲길」에서 진행하는 『지리산 둘레길 토요 걷기』였다.
지리산 둘레길을
걷고 싶은 사람들이 토요일마다 함께 모여 한 구간 한 구간 걷는 모임이다.
여럿이 함께 걸으니 안전했고, 탐방 센터 직원들이 길도 안내해 주고 숲해설사도 함께 동행하여 나무와 꽃에 대해 설명을 해주니 혼자 걸을 때보다 걷는 기쁨이 배가됐다.
더군다나 센터 담당자들은 주중에 우리가 걸을 길을 벌초하고 길을 안내하는 벅스가 제대로 서 있는지 확인하며 자연재해로 생길 수 있는 비상상황을 미리 확인하여 토요 걷기에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점검해주고 있다니 너무 고마웠다.
가깝게는 여수, 대구, 진해, 부산, 광주등 각지에서 오는 사람들과 멀리 서울과 인천에서 와 함께 걷는 모두가 친구가 되고 길동무가 된다.
산은 계절마다 먹을 것들과 볼거리들을 아낌없이 내준다.
서울에서 오는 어떤 이는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이곳 남쪽으로 내려와 하룻밤 자고 이른 아침 이 토요 걷기에 참여하러 온단다. 대단한 열심이다.
나처럼 매주 토요일마다 꾸준히 참여하여 마지막까지 완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매주 새로운 얼굴들이 참여하여 함께 걷기도 한다. 처음엔 서먹해도 밥 한 그릇 먹고 나면 헤어질 땐 아쉬워하며 또 만나기를 약속한다.
점심때가 되면 서넛씩, 대여섯씩 모르는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싸 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웃음꽃을 피운다.
처음 온사람은 대부분 김밥을 싸 온다. 그러나 자주와 본 나 같은 사람은 밥에 김치, 상추와 갈치속젓 갈 그리고 오이나 풋고추를 싸간다. 누구는 냉커피를 또 누구는 옥수수를 싸와 나눠먹는다. 어느 날 막걸리를 배낭에 지고 온 남자는 모두에게 막걸리를 나눠주어 환호성과 함께 박수갈채를 받았다. 땀 흘리고 난 후 먹는 막걸리란.....
캬~
유난히 더웠던 7월 말에도 우린 걸었다.
이런 날은 군인들도 쉰다는 데 우리는 무슨 돈도 않나 오는 일을 이렇게 사서 하냐 하면서도 누구 하나 쉬지 않고 걸었다.
앞서 길을 내주는 센터직원들은 둘레길 마을 마을마다의 아픈 역사와 숨은 얘기들을 가만가만히 풀어주었다. 지금의 지리산이 있기까지의 슬픈 사연을 말이다.
숨찬 한 주간을 살다가 달려간 지리산은 일렁이는 잎새들 사이로 햇살을 비춰주고 태곳적 땅의 신비로 어머니의 품처럼 우리를 맞아준다. 그렇게 지리산은 일상의 피로를 씻어주는 것은 물론이며 영혼의 안식처로서 앞으로의 날들에 소망의 날개를 달아준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시큼한 땀 냄새와 오늘도 피톤치드 보약 한 첩 먹은 기운 셈으로 노래가 절로 난다.
봄에는 산벚꽃과 앵두로 여름엔 짙푸른 녹음과 시원한 계곡물로 가을엔 주황빛 감과 단풍으로 어서 오라 손짓하는 지리산 둘레길
스페인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있다면 우리나라엔 지리산 둘레길이 있으며 그 지리산은 어머니같이 우리를 가만히 품어 주기도 하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속내를 가만히 풀어내 보일 수 있는 동무이기도 하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세 살 터울의 언니와 지난여름에는 자전거로 제주도를 한 바퀴 돌았다. 지리산 인연이 버킷리스트였던 제주도 자전거 완주의 꿈을 이루게 했다.
점심을 함께 먹던 몇몇 사람들은 은밀한 작전을 짜기로 했다.
몽블랑 트래킹에 대한 계획이었다.
‘지리산둘레길을 완주했으니 뭐 몽불랑쯤이야
그래 가보자. 알프스의 그 몽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