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거리 로테이션
본격적인 백수에 접어든 것은 이번 주부터이다.
지난주는 제주 혼자 여행이어서 외식 위주의 식단을 할 수 밖에는 없었고
(그래도 친구와 함께 한 한끼 빼놓고는 혼밥이었지만.)
주말은 아들과 남편이 있으니 혼밥은 아니었고
따라서 열심히 반찬을 준비했다.
실질적인 백수로서의 혼밥은
아들이 해외 출장을 가고 남편은 아산 공장으로 복귀한
어제 저녁부터라고 보면 된다.
저속노화식단이 유행이라는 요즈음
나는 저속노화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가급적 아프지않게 정상적인 속도로 늙어가고픈 마음이다.
그런데 항암중인 남편 덕분에 주말에는 아마도 저속노화식단이 저절로 준비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고기를 먹지 않고(원래 그랬다.)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하는(항암 주사를 맞으면 아구가 안 벌어진다고 한다.)
남편 때문에 다양한 국을 준비한다.
지난주는 오징어무국, 두부청국장, 소고기미역국을 끓였는데
남편의 원픽은 소고기미역국이었다.
물론 소고기는 얌전히 골라서 내 국에 넣어두었다.
나와 아들은 달달하니 잘 물러진 무우가 맛났던 오징어무국에 한 표를 던졌다만.
그런데 그것보다도 남편이 더 잘 먹은 메뉴가 있는데(다행이다. 무엇이라도 먹어주면 댕큐이다.)
경동시장에서 산 비금도산 섬초 나물이다.
시금치 나물인 셈이다.
살짝 데쳐서 간장 조금, 참기름 조금, 간 마늘 조금 넣고 조물조물한 그것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도 한번 해 먹어보겠다고 한다.
음식을 해보겠다는 반응이 나오다니 그리고
남편 최애 콩나물 무침을 이겨보기는 난생 처음이다.
그런데 말이다.
사람이 위치와 상황에 따라 선호하는 음식도 변하는 모양이다.
평생 콘푸로스트를 우유에 타 먹는 메뉴를 좋아한 적이 없다.
선천적으로 우유 소화가 힘든 신체여서 우유를 먹으면 여지없이 살살 배가 아팠다.
출근해야하는 아침에 배가 꿀꿀 거리면 안되니 당연히 패스였다.
그런데 요즈음 갑자기 콘푸로스트 생각이 나서 한번 먹어보니 괜찮은 거다.
출근을 안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기인한 멘탈에 의한 식성 변화인지는 알 수 없고
간단한 혼밥을 추구하는메뉴 선정도
오토매틱으로 로테이션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 사이의 시간 간격이 애매할때 간단하게 먹기는 딱이다.
최근에 갑자기 몰입하고 있는 간식은
오래된 제과점 태극당에서 나오는
모나카 형태의 우유 아이스크림이다.
우유랑 초코가 있는데 우유가 압도적이다.
심플하고 깨끗한 맛이다.
메인 디시를 덧보이게 하는 디저트 존재 이유의
정석인 듯 하다.
나는 한번에 반만 잘라서 먹는다.
그 정도의 양이 딱이다.
본점은 접근성이 별로인데 서울역 앞에 분점이 있다.
대구에 출장 다녀올 때 사왔더니 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앉은 자리에서 두개씩 먹었다.)
며칠전 본인이 서울역 갔다가 직접 사와서 쟁여두고 먹더라.
이번 주 내 혼밥 식단의 가장 큰 딜레마는 배추김치의 부재이다.
현재 부추김치, 파김치, 열무김치, 봄동 겉절이, 동치미가 있는데
메인이 되어야 할 잘 익고 맛있는 배추김치가 똑 떨어졌다.
어제 저녁 첫 혼밥은 남은 미역국에
편의점에서 산 잘라놓은 조그만 일회용 배추 김치였다.
미역국이 맛난 것인지 배추 김치가 맛난 것인지
성의없고 심난한 상차림인데도평소보다 많은 양을 뚝딱 먹었다.
야구는 선발 투수가 잘해야 하는 법이다.
선발 투수가 5회 이상 잘 막아주고
그 뒤로 중간 계투와 마무리 투수가 조금씩 책임져 주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투수 로테이션이다.
배추김치는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에이스 1선발이다.
누가 맛나게 딱 익은 배추 김치하나 나눔해주면 참 좋겠다만.
고민을 좀 해봐야 겠다.
어제 우여곡절끝에 노로바이러스 장염인 아들은 태국에 도착했다 톡이왔고(걱정이다.)
최강야구를 둘러싼 방송국과 제작업체의 싸움은 본격화된 기사들이 났고(마구 화가 난다.)
이른 출근도 딱히 빨리 처리해야할 중요한 일도 없는 오늘. 왜 이리도 일찍 잠이 깬 것이냐.(늙어서 그렇다.)
오늘 아침은 커피와 태극당 빵이다.
아들이 사다놓았던 것 중에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이다.
사과랑 방울토마토 딸기도 있는데
아침 사과를 선택할 확률이 가장 높다.
(궁하면 통하는 법.
냉동실에 얼려둔 묵은 배추 김치 한 조각을 녹여서
반은 멸치 넣고 김치국으로
나머지 반은 들기름과 설탕넣고 달달 볶아두었다.
이번 주말까지는 이것으로 버텨보련다.
김치국밥은 오늘 내 점심이고
울 아버지 최고의 감기 뚝 떨어지게 하는 비법의 메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