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차리자, 단디하자.
들뜨고 힘든 월요일 저녁을 보내고 나면(온전히
내 최애 <불꽃야구> 시청 때문이다.)
화요일 오전에는 말똥말똥한 정신이 되지는 않는다.
학교에 나갈때에 나는 한 시간 수업을 하고 나면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지더라.
컨디션도 살아나고 말이다.(역시 강의 체질이다. 어제도 강의를 하니 신났었다.)
대부분은 커피를 마셔야만 정신이 차려진다고 하는데 나는 커피와는 무관했다.
그런데 지금은 수업은 커녕 딱히 해야만 할 일도 없는 날이 대부분이니
정신이 100프로 말똥말똥해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특히 흐린 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요즈음 유행이라는
제주 여름귤을 하나 까먹고는 마냥 멍한 상태였다.
그러다가 배가 살짝 고파오는거다.
어제 저녁을 샌드위치 반쪽만 먹었던 생각이 났다.
밥을 해야겠다 싶었다.
쌀통이 별도로 있지는 않다.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나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한다. 가구도 식기도 최소이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쌀을 관리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아주 원시적인 방법으로
쌀을 한 번에 많이 사지 않으니 그냥 포대에 넣은 채로 보관하곤 했다.
그런데 시어머님 집을 정리하면서 남은 쌀을 받아온 것이랑 두 포대가 되어버린 그 상황이
오늘따라 그게 눈에 거슬리는거다.
싱크대 아래의 공간 좁은 것이 새삼스럽게 보이면서 말이다.
두 개의 쌀포대를 합치기로 한다.
조금 더 작은 포대에서 쌀을 한 그릇씩 옮겨 담는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마지막에 생겨난다.
다 옮겼다고 생각하고 마지막을 탈탈 털어보려고 포대째 옮기다가
소리나 무게로 보아서 이제는 다 옮겼다고 생각한
그 순간 쌀포대에서 분수처럼 쌀알들이 사방으로 쏟아졌다.
오전 내내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는데 사고를 치는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자고 있던 고양이 설이가 사고 현장으로 대뜸 달려오지는 않았다.
(설이는 모태성 겁쟁이가 아니면 신중한 스타일이다.)
할 수 없이 재래식 방법을 쓴다.
손으로 한알 한알 한 곳으로 모아서 다시 쌀을 푸는 자그마한 그릇에 담는다.
다행히 아주 많이 아주 멀리 퍼지지는 않았다고 안도한 그 순간, 이제 다담았다고 일어나려는 그 순간
나의 몸이 삐끗하더니 쌀을 모아두었던 그릇이 넘어졌다.(손아귀의 힘이 약한것인지 주저앉아있던 다리가 부실한것인지는 모르겠다. 둘 다일 확률이 제일 높다.)
두 번째이다. 똑같은 상황이 두 번째 일어나면 멘탈 붕괴가 따라온다.
먹던 것을 또 먹는 것 못지않게 내가 싫어하는 일이 똑같은 단순 작업을 다시 하는 것이다.
사방으로 순식간에 퍼지는 쌀알을 보면서 어제 컨설팅에서 들었던 놀라운 이야기가 생각났다.
과학실에서 예전에 사용하던 수은은 몇 년에 걸쳐서 학교별로 다 남아있는 양을 조사했고
전문업체에서 수거해갔다.
작년이 마지막 데드라인이라 했었다.
그런데 올해 3월 그 학교 실험실 뒤편에서 수은 알갱이가 들어있는 종이박스를 발견했다고 한다.
수은 알갱이도 마치 오늘 내가 떨어트린 쌀알들처럼 작고 멀리 퍼진다.
쌀알보다 더 작고 둥글고 더 빠르다.
그러니 그것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을지는 상상이 된다.
안전 매뉴얼에 따르면 일단 수은을 발견했을 경우 소량인 경우는 자체 처리를 한다고 되어 있단다.
(안전 매뉴얼이 자주 바뀌었는데 자체 처리는 말이 안된다. 처리가 엄청 힘들다.)
자체 처리해보려고 마치 오늘 내가 쌀알을 줍는 것처럼 처리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쉽지 않았단다.
알고 있다.
나도 38년전쯤에 실험실 수은 기압계가 깨져서 그것을 처리하느라 혼이 나갔던 경험이 있다.(그때는 매뉴얼도 없었고 수은이 우리 몸에 나쁜것인지도 몰랐다.)
자체 완전 제거에 실패한 다음 매뉴얼에 따라 소방서에 신고를 했다 한다.
20여명의 소방관 및 화학 약품 처리자들이 와서 사방을 측정하고 다니느라
오히려 오염장소만 늘어났고(주변 방문자수가 늘어날수록 오염 반원은 넓어지게 되어 있다.)
이런 사소한 것으로 신고했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 한다. 사소한 사고는 없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서야 전문업체를 동원하여 방제 및 소속 등의 작업을 진행했는데
시간도 오래걸리고 예산도 어마어마하게 들었다고 한다.
업무 담당자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럽고 힘들었을지 십분 이해가 간다.
오늘 나는 쌀알가지고도 십여분 땀을 빼고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는데
수은이라니... 아직도 학교에 수은이 남아있으면 절대 안된다.
그리고 안전 매뉴얼도 현실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언젠가 본청 담당 장학사를 우연히 만난다면 꼭 이야기를 전달해주겠다.
한번은 실수라고 할 수 있다.
고의적이고 계획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은 실수라고 봐주기에는 조금 그렇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를 보면 참으로 한심하고 안쓰럽다.
가급적 그런 일을 줄이려고 하는 노력이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나의 삶을 조금은 괜찮게 만들어준다.
이렇게라도 나의 마음을 다스려보려 하지만
그래도 바보같아서 화는 난다.
이런 실수를 할때면 친정 아버지가 해주시던 말이 있다. 물론 잔소리였다. 부산 찐한 사투리로 말이다.
<정신 차리라. 단디 해라. 너만 잘하면 된다.>
이제 우여곡절 끝에 청소는 마무리 되어가고
밥은 거의 다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