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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선생님, 퇴원하자마자 빅맥 안 되나요?

빅맥과 전복죽 사이, 그 어딘가

by 수평선너머

입원을 한 날로부터 10일이 되는 날 오전, 그제야 난 퇴원을 허락받았다.

회진을 온 의사는 나에게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병원에 너무 오래 계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배액량이 많이 줄었네요. 오늘 퇴원하시면 됩니다. 자세한 사항은 간호사가 추가로 이야기 줄 거예요. 혹시 궁금하신 점 있나요?”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따로 없습니다. 아! 혹시 퇴원하면 빅맥 먹어도 되나요?


그렇다. 난 내 수술의 뒤처리 상태나 주의사항 내지는 앞으로의 진료 일정은 궁금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것을 물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난 무지방식을 끊고 빅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아! 네, 드셔도 됩니다. 식단 제한 사항은 없어요.


빙고! 난 의사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의사는 돌아갔고, 담당 간호사가 와서 이것저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배액관은 11시 정도에 제거할 거예요. 제거하면서 주의사항이랑 병원비 수납, 퇴원 절차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의사 선생님이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하셨는데, 무지방식은 아니더라도 당분간은 저지방식 유지해 주세요. 아무래도 회복 초기에 너무 무거운 음식은 부담돼요.”


‘아… 나 환자였지.’ 퇴원으로 달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속으로 의사는 된다고 했는데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음식의 갈등은 잠시 내려놓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드디어 퇴원하네. 의사 선생님 방금 만났어. 12시 전후로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그래? 회사에 말하고 데리러 갈게.”

“바쁘면 그냥 택시 타고 가도 괜찮아.”

“그래도 어떻게 그래. 회사에도 이번 주 중에 남편 퇴원할 거 같다고 이야기해 놨었어.”

“알겠어. 그럼 출발할 때 연락 줘.”


아내와 결혼을 한 지도 10년이 가까워온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다. 주변인들은 처음에는 망설이다가도 가까워지면 묻는다. ‘왜 아이가 없냐고.’ 글쎄? 내 직업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다. 그래서 더 궁금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선택을 잘 못 내린다. 그래서 우리 집의 대소사는 나의 취향에 따라 결정되곤 했었다. 아이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시절 강아지를 키웠었다. 강아지는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책임감을 주었다. 강아지로 인하여 쉽사리 여행을 가지도 못했고 집을 비우지도 못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산책에 대한 인식도 크지 않아 강아지를 데리고 밖에 나가는 일은 일주일에 3-4번 정도였다. 그 작은 방 안에서 외롭게 머물렀을 강아지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가게 되었고, 더 이상 강아지를 키울 수 없게 되었다. 강아지를 싫어하는 어머니는 잘됐다면서 주변 지인에게 강아지를 맡겼다.


강아지마저도 이런데 하물며 아이는 어떤 책임감으로 키워야 할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주변의 친한 이들은 아이를 낳아 기르는 기쁨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에게 병원에 가서라도 아이를 가질 것을 권했다. 나는 대체로 쉽게 선택을 내리는 편인데 아이를 가지는 문제는 선택이 참 어려웠다. 결국 선택을 유보했고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도 노력하지 않으려고 하지도 말자. 그냥 찾아오면 반기고 찾아오지 않는다고 서운해 말자. 그렇게 살다 보니 아이 없이 10년 가까이 정확히 햇수로 9년째 살아오고 있다. 고맙다.


처음 갑상선암에 걸렸다고 이야기를 전했을 때, 아내는 많이 놀라고 힘들어했었다. 아무래도 같이 사는 가족이 둘밖에 없다 보니 더 그랬지 않을까 싶다. 다행히도 나에 비해 아내는 단단하고 안정적인 사람이었다. 결혼하기 전의 나를 되돌아보면 불안하고 예민하고 예의가 없었다. 지금도 그런 모습의 잔재는 남아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그 일을 곱씹고 사고를 확장하며 괴로워하는데, 아내는 순간은 힘들어하더라고 금방 잊고 제자리를 찾았다. 그래도 림프절에 전이되었다고는 차마 이야기를 못했었다. 순간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듣고 걱정하고 힘들어할 아내가 떠올랐고, 그 모습에 예민한 나는 스스로가 더 불안하고 힘들어질 것 같았다. 역시 나이가 들었나 보다…


갑상선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불가피하게 전해야 되는 사람들에게만 전했을 때 받은 위로는 많았고 고마웠다.


임용고사를 준비하던 시기에 갑상선암에 걸렸던 대학동기는 한달음에 집까지 찾아와 주었고, ‘괜찮은 거라고. 나도 걸렸는데 멀쩡히 15년째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며, 우리 부부를 달래주었다.


그래도 주변에 갑상선암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 아내가 이야기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고마운 친구다.


11시다. 배액관이 제거되며 매일 달고 다니던 주머니가 사라졌다. 목에 붙어있던 두꺼운 밴드는 제거되었고, 가벼운 밴드가 붙었다. 외래진료일을 확인하고, 외래일까지 먹어야 되는 엄청난 양의 약을 받고 여러 가지 주의사항들을 다시 한번 들었다.


환자복을 벗고, 입원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입었다. 냉장고를 열어 입원동안 먹을 수 없었던 오레오를 꺼내 다시 캐리어에 담았다. 안대, 귀마개, 스포츠 타월 등등 한 평 남짓의 공간에서 나의 흔적을 지우는데 열중했다. 10일 동안 생활 했던 모든 물건이 24인치 작은 캐리어에 담겼다. 집에 대한 향수를 달래줬던 베개는 따로 쇼핑백에 챙겼다.



아내에게서 병원 주차장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깜박’ ‘깜박’


비상등이 켜진 상태의 차에 짐을 옮겨 실었다. 아내는 몸의 상태를 물었다. ‘목안이 좁혀지는 느낌이 나고 당겨. 왼쪽 날개뼈가 욱신거려서 잠을 잘 못 잘 때도 있어. 승모근과 어깨가 계속 결린다. 왼쪽 목피부가 내 피부 같지 않아. 만지면 두꺼운 가죽 만지는 거 같아’ 여러 가지 말을 속으로 삼키고는 이야기했다.


“응. 괜찮아. 빅맥 먹고 싶었는데 의사는 된다고 하는데 간호사가 안된다고 하네.”

“원래 수술하는 의사는 수술이 잘되었나랑 상처회복 위주로만 살펴 본대. 먹는 거나 일상생활 관련해서는 간호사 말 들어.”


집을 향하는 차 안에서 점심을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되었다. 결국 망설임 끝에 선택한 메뉴는 죽이었다. 전복죽과 전복내장죽을 놓고 고민하다 내장의 기름기가 좋지 않을 거 같아 전복죽을 주문했다. 먹을 거를 놓고 성분을 하나하나 생각하고 검색하면서 참 별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왼쪽 승모근에서 오는 통증이 아직 환자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죽집의 메뉴 구성은 단출했다. 메인 메뉴인 죽과 쇠고기 장조림, 오징어초무침과 동치미 국물이 전부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주문한 전복죽을 받아서 집으로 향했다.


10일 만에 돌아온 집은 그대로였다. 익숙한 현관, 좁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짐을 담은 캐리어는 잠시 내려놓고, 거실 테이블에 포장해 온 전복죽을 펼쳐놓았다. 포장용기의 뚜껑을 열자 전복죽에서 은은한 전복의 향과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복의 양이 너무도 적어 전복을 찾기 어려워 자동으로 저지방식이 되고 있었다. 문득 풍족하게 전복이 담겨있던 집에서 해 먹던 전복죽이 떠올랐다.


마트에서 전복이 할인 중일 때 전복을 사면, 주로 전복술찜을 해 먹고 아주 가끔 남는 전복으로 전복죽을 했다. 집에서 음식을 해 먹는 것의 단점은 귀찮다이며 장점은 풍족하다기에 정말 가끔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전복을 칫솔로 박박 긁다시피 세척해 준다. 세척이 끝난 전복을 숟가락으로 껍데기와 분리하면 내장까지 같이 나온다. 내장은 찬물에 씻어놓고 전복은 이빨을 제거하고 큼직큼직하게 썰어놓는다. 여기까지가 절반이다.


씻어놓은 전복 내장을 믹서기에 물과 함께 넣어 간다. 갈린 전복 내장에 데우지 않은 햇반을 넣고, 믹서기로 함께 갈아준다. 내장을 먼저 갈 데와는 다르게 ‘우우우우우우웅’이 아니라 짧게 ‘웅 웅 웅’ 느낌으로 4-5번 갈아준다. 그다음에는 웍이나 팬에 참기름을 두르고 전복을 볶는다. 1-2분 정도 볶다가 믹서기에 갈린 햇반과 전복 내장을 넣고 물을 추가해서 끓이다. 끓기 시작하면 약간의 소금 간을 더하고 약불로 10여분 정도 졸여주면 음식이 완성된다.


그렇게 집에서 만든 전복죽은 커다란 전복이 곳곳에 위치해서 내가 전복죽이라는 것을 뽐낸다. 색은 내장이 섞여 올리브빛 갈색을 낸다. 한 숟가락 떠서 입안에 넣으면 전복내장의 고소함과 쌉쌀함이 묘한 감칠맛과 어우러져 깊은 맛이 난다. 나는 전복내장이 이렇게 맛있는 부위인지 이전에는 알지 못했다. 두껍게 썬 전복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씹히는 맛이 느껴진다.

전복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맛을 즐기겠지만 난 싫어하기에 전복을 삶아서 연하게 만들고 최대한 얇게 썰어 전복의 단맛과 감칠맛만을 느끼고 싶지만 번거로워서 그냥 두꺼운 전복을 먹는다.


숟가락으로 식당의 전복죽을 뜬 짧은 시간에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전복죽을 입안에 넣었다가 뺏다. ‘뜨거웠다.’ 죽은 호호 불고 먹어야 한다. 적당히 식은 죽을 입안에 다시 넣었다.


‘맛있었다.’

연이은 무지방 저염식으로 예민해진 혀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 짠맛을 잡아냈다. 뭉개진 밥알들이 부드럽게 흩어지는 와중에 전복의 은근한 단맛과 짠 바다 내음이 전해졌다. 천천히 씹었다. 조각나서 느껴지지도 않는 전복살이 지금은 부드럽게 녹아들어 좋았다. 밖에서 사 먹는 전복죽에서 처음으로 전복을 느꼈다. 허겁지겁 몇 숟가락을 더 떠서 먹다 목이 메어 옆에 있는 동치미 국물을 들이켰다. 어떡하지? 이마저도 맛있었다. 동치미 국물이 너무 시원하고 달았다. 설탕을 탄 게 아닌가 의심스러워 아내에게 동치미 국물을 권했다. 아내는 평범한 동치미 국물이라고 했다. 쇠고기 장조림과 오징어초무침도 한 입 한입이 너무 소중했다. 빅맥이 아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고개를 들어 거실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산과 논두렁 옆에 지어진 아파트는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파란 하늘, 색을 바꾸기 시작하는 나뭇잎, 추수를 기다리는 노랗게 익은 벼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복죽의 온기가 아직 몸 안에 남아있었다. 그 온기가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데워주고 있었다. 길었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


‘안녕. 집에 돌아왔네. 너는 그대로인데 나는 상처 하나를 가지고 왔어. 집에서 밥을 먹으니 조금은 살 것 같아. 다시 이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도와줄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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