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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만 고지방식으로 간다: 첫 외래와 연어

첫 외래날 한 일: 진료, 보험, 연어

by 수평선너머

첫 외래진료일은 중요하다. 수술에서 떼어낸 갑상선과 림프절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이후 치료와 회복의 방향이 결정되며, 온갖 행정적 절차의 처리가 가능해진다.


오전에 병원에 도착했다. 채혈실에서 피를 뽑았다. 피를 뽑고 한 시간 뒤 약속된 의사와의 면담 시간이 다가왔다.


“잘 지내셨죠? 조직검사 결과를 보니까 갑상선에서 5개, 림프절에서 11개의 암세포가 발견되었네요.”

“어? 갑상선에 2개가 아니었나요?”

“초음파로 보이지 않았던 암세포가 몇 개 더 있었어요. 예상했던 것처럼 림프절에서도 암세포가 나와서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가 추가적으로 필요해요.”


림프절 전이가 확인되었다는 것은 수술로 제거하기 힘든 미세한 암세포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말한다. 따라서 추가적인 치료, 다시 말해 방사성 동위원소 치료가 필요하다. 흔히 말하는 방사선 치료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갑상선암 진단을 받고, 수술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과정을 경험하는 것 같다.

‘그래, 나중에 재발 걱정하느니 이번에 전부 다 해치워버리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암까지 제거가 필요해요. 핵의학과랑 협진 잡아놓을 테니, 오늘 중에 예약하고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이상하게 의사와 만나게 되면 마음속 깊숙한 질문을 하기 어려웠다.


‘갑상선에 5개, 림프절에 11개는 많은 건가요?’

‘위험한 건가요?’

‘재발 안 하는 거죠?’

‘나 괜찮은 건가요?’

'핵의학과라니요? 그거 무서운 거 아니죠?'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올랐지만 결국 하나도 하지 못했다. 혹시라도 위험한 거라고, 괜찮지 않다고 이야기할까 봐 무서웠다. 의사는 친절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묻는 모든 질문에는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떠오르는 질문을 하지 못했다.


결국 의사가 나가고 난 뒤, 간호사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간호사는 괜찮다고 지금도 모두 다 깨끗하게 제거된 것이라고, 혹시나 있을 미세암세포 제거 때문에 방사성 치료하는 것이라고 이야기 주었다.


‘그래.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수술 잘하는 것으로 손에 꼽는 병원이야. 이 이상으로 잘할 수는 없었어. 나머지는 병원을 믿고 맡기고,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굳은 결심을 하고 간호사에게 물었다.

“아. 이젠 지방 있는 음식 먹어도 되나요? 소고기나 연어 같은 거?”

“네, 드셔도 괜찮은데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세요.”


대학을 가고 자취를 하면서, 이상하게 대형 마트가 좋아졌다. 당시 내가 졸업한 대학교 인근에는 ‘홈플러스’가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월마트’, ‘까르푸’, ‘그랜드마트’ 등 온갖 특이한 마트가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이마트’나 ‘롯데마트’는 오히려 없어서 고향집에 내려가야만 갔었다.


경기도의 중소도시에서 살다가 커다란 도시를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마트도 특이했고, 그 안의 사람들도 훨씬 많았다. 마트마다 진열되는 물건이 다른 것을 비교하는 것도 재밌었고, 낯선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았다. 그때의 마트는 지금보다 훨씬 거대하고 복잡하게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동하는 범위가 넓어지면서 ‘코스트코’를 가장 좋아하게 되었고, 이후 ‘이마트 트레이더스’가 생기면서 두 곳을 모두 자주 갔었다.


마트 중독자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나는 결혼 초에 하루에 세 군데의 마트를 갔다가 진이 빠진 아내에게 한 소리를 듣기도 했었다. 어떡하냐? 코스트코를 가서 양고기를 샀고, 채소를 살려니 너무 양이 많아서 소량을 파는 이마트를 가야만 했었고, 이마트의 농산품이 너무 시들 거려 마트킹을 가야만 했는걸…


사실 아이가 없는 맞벌이 가정이 코스트코를 가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코스트코는 모든 물건을 대용량으로 판다. 4인 가족 정도는 돼야 장 보는 데 적합하고, 4인 가족도 여아 2명이 포함된 구성이라면 살짝 고민될 정도로 엄청난 양을 파는 곳이다. 우리 집에 가장 어울리는 형태는 인근 ‘이마트’와 ‘쿠팡 프레쉬’다.


하지만 나는 마트에서 카트를 끌고 이것저것을 둘러보는 게 좋다. 코스트코에 가면 물건을 사지 않고 구경만 해도 재미가 있었다. 마트를 둘러보고 하나의 물건도 사지 않고 나간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납득했다. 가계부에서 코스트코의 연회비 카테고리가 ‘생활비’에서 ‘문화 여가비’로 옮겨졌다.


2인 가정이 코스트코에서 살 수 있는 물품은 많지 않다. 소분해서 냉동이 가능한 물건, 건조해서 유통기한이 긴 물건, 그리고 공산품 정도가 가능했다.


둘이서 먹으려면 일주일 내내 연어만 먹어야 하는 커다란 연어필렛은 그림의 떡이다.


누군가는 남은 것 얼리면 되지 않냐는데, 맛있는 생연어를 먹다가 남은 것을 냉동해서 구워야 할바에야 사지 않는 것을 택하겠다.


지방 있는 음식을 떠올리자 연어가 먹고 싶어졌다. 질릴 만큼 먹고 싶어졌다. 나는 병원에서의 행정절차를 마치고 연어를 사기로 결심했다.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면 공식적으로 암환자로 인정받는다. 이를 산정특례라고 하며 병원에서 등록을 도와준다. 산정특례자가 되면 5년 동안은 암과 관련된 전체 치료비 중 급여 부분은 5%만 내게 된다. 건강보험가입자가 원래 20%만 내던 것에 비하자면 금액이 상당히 줄어들며, 산정특례 이전의 한 달까지의 치료비는 소급된다. 내 경우는 입원 수술비가 약 100만 원 정도 환급되었다. 또 실비보험이 있다면 암확정진단서와 조직검사결과지를 발급받아가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첫 외래진료 때 이루어진다.


보험 관련 업무를 후다닥 해치우고, 점심을 병원에서 대충 때웠다. 약국에서 3달치 갑상선 호르몬약과 칼슘약, 칼슘보조제를 사고, 오후에 핵의학과와 방사성 동위원소 일정을 잡고 교육을 받았다. 이 모든 과정은 힘들었다. 9시에 병원에 도착했던 나는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병원을 떠날 수 있었다.


코스트코를 들려서 연어를 사고, 집에 가서 요리를 하기에 너무 지쳐버렸다. 아내는 회식이었고, 저녁도 점심처럼 대충 때우려다 나는 꿩대신 닭이라고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대형마트를 갔다.


‘이지바이봉담’ 색다른 대형마트가 정복되었다. 이거 참 마트 도장 깨기도 아니고...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마트는 컸다. 그리고 난 연어필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코스트코 연어에 비해 한없이 작고 귀여웠지만 혼자서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


오늘의 저녁은 ‘연어 아보카도 덮밥’이다!! 동물의 지방과 식물의 지방을 모두 양껏 먹어주겠다는 일념으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연어필렛을 흐르는 물에 헹구고 키친타월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냉동고를 열고, 마트에서 마감세일할 때 사서 손질해 얼려둔 아보카도와 와사비, 냉동시켜 놓은 밥을 꺼냈다.


냉장고에서는 양파를 꺼내 1/4조각 정도 가늘게 채 썰어 찬물에 담가 놓았다. 전자레인지에 냉동밥을 넣고 돌리는 동안 ‘연어 아보카도 덮밥’의 소스 레시피를 검색했다. 간장 2숟가락, 물 2숟가락, 설탕 1숟가락, 식초 1.5 숟가락을 섞는 게 다였다. 냉장고에서 연어필렛을 꺼내 썰었고, 아직 덜 녹은 아보카도 반조각을 억지로 썰었다.


“땡”


전자레인지에서 밥을 꺼내 그릇에 담았다. 위로 소스를 절반 정도 뿌렸다. 양파를 넣고 아보카도를 올렸다. 그리고 그 위로 연어를 올렸다. 올리지 못하고 남은 연어는 다른 접시로 옮겼다. 마지막은 화룡점정 계란 노른자를 올렸다.



이게 뭐라고 설레는 걸까? 오랜만의 고지방식이었다. 밥을 크게 한 숟가락 떴다. 소스가 배여 갈색인 밥 위로 주황빛 연어와 초록빛 아보카도를 올렸다. 젓가락으로 와사비 약간과 양파도 추가했다. 넘칠 것 같은 그 한 숟가락을 겨우 입안에 욱여넣었다.


아… 행복했다. 연어의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식감이 먼저 느껴졌다. 조금 물컹한 냉동 아보카도의 식감이 아쉬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삭한 양파, 톡 쏘는 와사비가 간이 배인 밥과 만나 입안에서 불균형의 조화를 이루었다. 씹을수록 다채로운 맛이 났다. 하지만 연어의 존재감이 압권이었다.


짭조름함과 부드러움, 기름짐 그리고 알싸함과 아삭함이 계속해서 입안에 맴돌아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고 계속 새로웠다.


꽤 많았던 양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올리지 못하고 남겼던 연어까지 꺼내 올려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이렇게 배부르게 먹은 게 얼마만이던가. 꺼질 줄 모르는 배를 보며,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상하게 마음은 편했다. 지방을 이렇게 마음껏 먹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배가 부르다는 감각이 좋았다.


병원의 일은 병원에게 맡기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자.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는 일이 이렇게 기쁜 일이라는 것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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