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채요리는 마음을 달랬고, 엄마한테는 미안해.
수술을 하고 3주가 지났을 무렵 명절이 찾아왔다.
나는 아직도 아내를 제외하고 가족 중 누구에게도 암에 걸렸단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갑상선 수술을 하고 나면 목주름에 맞춰 길게 가로로 흉터가 남는다. 매일 아침 씻으면서 거울을 본다. 내 목에는 여전히 낯설게 자리 잡은 흉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손으로 흉터 위 목을 만지면 여전히 다른 사람의 피부 같다. 내가 아닌 누군가의 가죽을 만지는 느낌이 영 어색하다.
아침 6시에 눈을 뜬다. 눈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리맡에 놓은 갑상선 호르몬 약을 먹는다. 전날 밤 먹을 약과 마실 물 한잔을 머리맡에 놓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피곤함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7시다. 출근을 준비하는 아내의 소란에 잠을 깬다. 방울토마토를 몇 개 집어먹고, 감자를 손질해서 레인지에 돌린다. 두유를 한 컵 따르고는 냉장고에서 요거트를 꺼내 냉동블루베리를 한 주먹 정도 넣는다. 호르몬 약을 먹으면 공복을 1시간 정도 유지해야 한다. 6시에 약을 먹었으니 지금쯤은 아침을 먹어도 된다.
새벽에 호르몬 약을 먹고, 칼슘약과 보충약을 아침, 점심, 저녁 식후 3번 먹어야 한다. 하루에 4번 약을 먹는 것도 어지간히 힘든 일이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씻기 시작한다. 이때야 비로소 내 흉터를 맞이하게 된다. 갑상선카페의 다른 사람들은 1-2주만 되어도 흉터가 옅어지고, 길이도 짧아 눈에 띄지도 않아 보인다. 반면 내 흉터는 여전히 진한 붉은 선처럼 남아있고, 길이도 제법 길다.
그 위로 내 살과 유사한 색을 지닌 실리콘밴드를 붙인다. 멀리서 보면 흉터가 거의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본다.
사람의 마음은 참 묘하다. 암을 진단받은 뒤에는 절망에 빠진다. 그 절망에서 서성이다가 수술 병원을 찾으면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겨우 일어난다.
재미있는 건 그다음이었다. 암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술 병원까지 결정한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미용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목에 흉터가 남지 않도록 겨드랑이를 절개해 로봇 팔을 넣는 ‘로봇 수술’은 그러한 마음에서 시작된 기술이다. 보험이 되지 않아 천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지만 누군가는 그 수술을 선택한다.
수술 의사가 수술하고, 성형외과 의사가 마무리 봉합을 하는 경우도 있고, 피부과에서 흉터 레이저를 받는 사람들도 많다. 살아남은 뒤에는 살아있는 흔적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림프절 전이가 있었고, 미용을 고려할 여지는 없었다. 수술이 끝난 뒤에는 그저 추가전이나 재발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용을 위한 조치는 병원에서 준 실리콘 밴드와 실리콘 연고가 전부였다.
그러다가 명절이 다가왔다.
몇 해 전 아버지가 떠난 뒤로 어머니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명절에 뵐 때마다 조금씩 작아지는 어깨, 느려지는 걸음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엊그제만 해도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던 내가 이제는 그 손을 잡고 부축해야 했다.
그 사실이 견디기 어렵게 낯설고 슬펐다. 그래서 병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감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해봤자 걱정만 늘 뿐 달라질 건 없을 테니까… 어머니와 함께 사는 누나에게만 겨우 사실을 알렸다. 누나도 평생 어머니에게 알리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명절이 시작되었다.
먼저 처가에 들렸다가 어머니를 찾아뵙기로 했다. 장인어른과 장모님께는 사실을 알렸다. 아니 숨길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내 목은 이상했다. 10cm 가까이 되는 밴드가 목에 떡하니 붙어 있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두 분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명절 내내 몸에 좋다는 식당을 찾아다니셨다. 내가 불편해할까 봐 차마 깊게 묻지는 못하시고 먹고 싶은 게 없냐며 연신 물어보시는 그 마음이 감사했다.
남원의 산채요리로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30가지가 넘는 반찬이 상 위에 가득했다. 가지런히 놓인 접시마다 이름 모를 나물들이 가득했다. 벽에는 ‘해독작용’, ‘항암작용’, ‘면역력증진’ 같은 글귀가 나물의 사진과 더불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장인어른은 하나하나 그 효용을 이야기 주시며, 남기지 말고 다 먹으라고 했다. 그 마음이 고마웠다.
잠시 뒤 돌솥밥이 나왔다. 밥을 푸는 순간 뜨거운 김이 얼굴을 스쳤다. 그 위에 산채나물을 한 줌씩 얹고, 참기름을 한 바퀴 둘렀다. 고추장이나 간장 같은 소스 없이 나물만으로 비벼지는 밥이 신기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입안에서 나물의 향이 천천히 퍼졌다. 쌉싸름한 나물의 맛이 고소한 참기름으로 이어졌다. 다른 것보다 밥알이 살아 있었다. 좋은 쌀을 써서 시간을 들여 지은 돌솔밥은 맨밥을 먹어도 좋았다. 천천히 씹다 보면 마지막에 밥알의 단맛이 남았다. 사위가 아파서 걱정이시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어머니를 찾아뵙는 날이 다가왔다.
긴 연휴라 그런지 차가 분산돼서 길은 한산했다. 아내가 수고가 많았다. 내 병에 대해 자세히 묻지도 못하고, 걱정만 가득하셨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달래느라 연휴 내내 힘들었을 것이다. 그 수고가 마음에 남았다.
어머니는 한쪽 눈이 나쁘시다. 몇 해 전 수술을 받으시고 나서는 한동안 부축 없이는 걷지도 못하셨다. 최근에야 겨우 혼자서 걸으시고 외출하신다고 들었다.
집에 있던 1박 2일 동안, 다행히 어머니는 내 목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하셨다. 말수가 줄고, 목소리에 기운이 없어도 감기 기운 정도로 여기신 모양이다.
커피숍에 앉아 마주 보고 있을 때는 나는 괜히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으로 목을 가렸다. 혹시라도 상처가 비칠까 염려되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이상을 느끼지 못하셨다. 다행이었는데 그 다행히 조금은 아팠다.
집에 돌아와서는 뻗어버린 것 같다. 아내도 꽤나 지친 것 같았다. 연휴가 길어 다행이었다. 조금이라도 쉴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다음 명절 때까지는 흉터의 관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관리하면 흉터가 목주름에 가려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했다. 물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모르는 타인과 달리, 어머니는 나에게 관심이 많으시기에 알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어머니는 눈이 나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