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1960~1989)을 만났다. 사실 시인은 내가 문학관을 찾기 전에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하는 숱한 시인 중 한 명이었다. 광명터널을 지나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중에 아내가 먼저 방음벽 너머로 보이는 문학관 간판을 발견했다. 며칠 후에 바로 문학관을 방문했다.
들어가서 가장 대표작인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안개’를 읽자마자 그 자리에 한참을 서서 있었다. 시인은 나와 동시대를 살다 간 사람이다. 그것도 내 나이의 절반도 채 살지 못하고 이립(而立)을 앞둔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대학이라도 같았다면 아마 한 번쯤 서로 스쳐 지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멀지 않은 곳의 공간을 공유한 사람이었다.
문학관에서 시인의 일생을 접하고 집에 돌아와서 ‘기형도 전집’을 주문했다. 시 뿐 아니라 수필이나 소설도 남긴 작품이 제법 있었지만, 워낙 창작 기간이 짧았던 탓에 전집 한 권에 거의 다 수록되어 있었다. 시인의 시가 유독 다른 시인에 비해서 나의 가슴을 흔들어 놓은 이유는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일단 비슷한 성장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이른바 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뭐라고 특정 지을 수 없는 유사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샛강, 방죽, 안개, 공장지대는 나의 생활 주변에도 있었다. 그리고 시인의 시는 현대시의 대표적 경향인 초현실주의나 사실주의보다는 서정주의 경향이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시인이 시에서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시상이 난해하지 않은 경향을 띠고 있을 때, 독자의 마음속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시인은 절대 외형적 深美語를 사용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어떤 비유를 시 안에 심어 놓았다고 해도 난해한 암호를 해독하듯이 시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 물론 내가 시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기 때문에 시에서 보여주는 현실과 다양한 환경에 그나마 다른 세대들보다 익숙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실례로,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라든지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이상 엄마 걱정)과 같은 그림은 나에게도 익숙한 그림이었다.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대학 시절)라는 부분도 나에게는 익숙한 그림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위험한 가계), ‘그날 밤 삼촌의 마른기침은 가장 낮은 음계로 가라앉아 다시는 악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삼촌의 죽음)와 같은 비유도 한참이나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는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므로 시도 그림처럼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데, 아버지와 삼촌이 쓰러지는 모습이 한 장의 그림처럼 눈앞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직 시인의 작품을 모두 섭렵한 것은 아니다. 단지 전집의 ‘시’ 부분 중 일부만 읽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어느 시인의 시집이든 간에 읽는 사람에게 자기의 처지에 어울리는 공감을 전해주기 마련이다. 시인의 시가 나에게 준 공감은 나도 시인처럼 시를 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이 아니라, 나도 시인처럼 내 감성에 솔직할 수 있는 내면의 자질이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이 부분은 나의 詩作 생활에 있어서 앞으로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도 나와 같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체계적인 문학 수업 대신에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연세춘추에 작품을 발표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난 후에 본격적으로 시집 출간을 준비하던 시기에 세상을 떠난 까닭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유고 시집이 발표되고 난 후에야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서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나는 늦은 나이에 시를 시작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체계적인 제도권 문학 수업에 대한 불확실한 갈망이었기 때문에, 시인의 그런 행보에서 나름대로 나만의 공감을 찾는 중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중이다.
늦게나마 시인을 알게 된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시를 한 편 소개하고 싶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이 자리에 덧붙였던 몇 줄의 저의 기억은, 위의 시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하여 삭제하였습니다. 나중에 다른 글로 발행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