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바쁜 아침 일과를 마무리하고 옷을 챙겨 입는데 아내가 어딜 가냐고 묻는다. 나는 종량제 봉투를 버리러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요즘 하지 않던 말을 한다. “나도 같이 나갈까?” 나는 아내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걷기 싫어하는 아내가 무슨 일이람?’ 아내가 거실 창밖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논길로 한번 돌아보자.”
한 손에는 쓰레기봉투를 들고, 한 팔은 아내에게 맡기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조끼를 입고 나올 걸 그냥 나왔네.” 일 층 현관을 나서며 아내가 말한다.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아내답다. “그래도 이제 봄이야. 바람이 그리 차갑지는 않잖아?” 조끼를 입으러 다시 올라가기 싫은 내가 말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즐비하게 늘어선 공장 골목을 지나니 눈앞에 곧게 뻗은 농로가 보인다. 호조벌이다. 그러고 보니 이사 와서 논길은 처음인 듯하다. 바람만 세지, 길은 평지인 덕에 아내가 별로 힘들어하지 않는다. 이 정도라면 날이 풀린 후, 자주 나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좁은 논길에 각양각색의 경고판과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온다. ‘8톤 이상 대형 트럭 출입 금지’, ‘개발제한구역 불법행위 안내’, ‘이 지역 성토행위 전면 금지’, ‘불법 성토 시 즉시 고발 조치함’ 등의 글들을 보면 호조벌이 앓는 몸살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자연보호와 농민 생존권의 대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오늘은 첫날이니 가장 가까운 길로 논을 한 바퀴 돌고, 다시 공장 지역으로 돌아왔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골목을 돌다 보니 집 앞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저만치 앞에 우리가 가끔 가던 동네 카페 간판이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손님은 한 테이블뿐이고 실내에는 잔잔한 음악만 흐를 뿐, 아주 조용했다.
음료를 마시고 토스트를 먹는데 아내가 말한다. “오늘 얼마나 걸었는지 봐야지.” 내 생각에는 기껏 삼천 보?, 그랬는데 아내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삼천 보도 못 걸었네.” 아마 오랜만에 걷다 보니 힘이 들어서 많이 걸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민망한 듯 생글거리며 웃는 아내의 얼굴이 마치 열여덟 어린아이 같다.
주문대 한쪽에 ‘주문 배달 안내’가 세워져 있었다. 가까운 곳이라면 9,000원 이상 주문부터 배달할 수 있단다. 이런 것이 동네 카페인가? 그동안 몇 번 왔으면서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집이 바로 저기 뒤 아파트인데 가능하냐고 하니 가능하단다. 묻고 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쌍팔년도 커피 배달도 아니고. 그래서 금방 말을 바꿨다. 그냥 산책 삼아 내려와 마시겠다고.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한쪽 벽에 간이 서가가 보인다. 책이 대략 삼십 권 정도? 손님들이 책을 읽기도 하냐고 물었더니, 가끔 와서 읽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아내가 묻는다. “당신도 책 읽게?” 나는 대답했다. “아니, 내 책 갖다 놓고 손님들 읽게 하면 어떨지 해서.” 아내는 그것도 좋을 것 같다고 한다. 다음에 집에서 몇 권 들고 나와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카페를 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딸이 방에서 나와 맞는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아까 나갈 때 같이 나가자고 하는 것을 싫다고 한 딸을 약 올리려고 늦게 들어오겠다고 했었다. 딸은 우리가 어디 나가기라도 하면 계속 칭얼거린다. ‘가지 말라고’, ‘빨리 오라고’. ‘혼자 있기 싫다고’ 아무튼 딸은 지독한 마마걸, 파파걸이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3월 어느 날 나는 아내와 같이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