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끌림의 서 02화

끌림의 서 Chapter 1 피할 수 없는 외로움

해가 지기도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

by 지영Robin
비 내리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


비와 폭염이 번갈아가며 괴로운 요즘입니다. 밤새 평안하셨나요?


더울 땐 겨울의 차가움이 그리우면서도 생경하고, 추울 땐 여름의 뜨거움이 생각나면서도 아련하고 이율배반의 감각으로 버텨보려는 건 참 변함없는 버릇입니다. 덥거나 춥거나 하는 그 모든 변덕스러움에도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해지기 전의 주홍색과 분홍빛 때때로 보랏빛도 살짝 머무는 그 시간입니다.

새벽녘의 푸른빛과는 또 다른 빛깔을 선사하는 석양이 지는 그 짧은 찰나. 어릴 때에도 나이가 든 후에도 변함없는 취향 중 하나는 그것입니다. 생애 가장 첫 기억이 그 주홍빛 석양이 지는 때의 하늘을 본 것과 맞닿아 있다 본다면 너무 억지스러울까요?



그러다 해지기 전이 가장 외로웠을 누군가가 문득 떠오릅니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에서 그곳에서 살다 죽었을 "단종"이라는 칭호의 열일곱 남짓된 사내아이.

마치 그가 된 듯 그곳을 바라보니, 그저 한없이 막막했습니다.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죄인 아닌 죄인으로 유배를 떠나, 지내야 했던 청령포. 짧은 거리지만 물길을 건너야 해서 오가기 쉽지 않은 길이었을 듯도 싶고 창살 없는 감옥처럼 오갈 데 없이 오롯이 그곳에 덜렁 작은 집 한 채 하나가 더없이 외로운 풍경. 어느 공간이 그처럼 애처롭고 안쓰러운 곳이 또 있을까 싶은 곳이었습니다.


한편, 왕위를 빼앗긴 조카가 의지를 세울 수 없도록 가둬두기에 이렇게 완벽한 공간이 있을까요?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끝내는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게 만든 그 잔혹함을 청령포 곳곳에서 느꼈습니다. 제가 있었던 그때에 겨울비가 주룩주룩 많이도 내렸으니, 제가 더 감정적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그 집 처마 아래 시가 적혀 있었는데 단 한 구절이 뇌리에 깊이 박혔습니다.


"맹수가 내려올 것을 걱정해, 해가 지기도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

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사람도 오기 힘든 곳, 사립문을 닫으나 열어놓으나 별 차이도 없는 그곳에 문을 닫아걸으며 어린 단종은 그 외로움, 두려움, 원망을 어찌 참아냈을까 싶은 마음에 명치가 걷어 차인 듯했습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순간을 우리는 가끔 겪습니다. 차라리 배신이 확인되는 순간이 오히려 나을 수도 있을 겁니다. 배신이 확인되기 전의 그 미묘한 분위기와 뉘앙스, 나만 눈치채지 못하는 건 아닌가 싶은 초조함과 외로움, 그래도 끝까지 믿고 싶은 아둔함까지 우리는 무던히도 반복해왔습니다. 이렇듯,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만큼 배신을 당한 횟수와 비례할 겁니다.


오죽하면, 배우 윤여정 씨가

"인생은 언제나 배신이 기다리고 있어. 그렇지만 매일매일을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라는 말씀하신 것에 무릎을 치고 내내 곱씹게 되는 위안을 얻게 됩니다.


제가 만나왔던 수많은 분들의 고민 끝에 항상 '나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모두 비슷하구나.'를 알게 되면 외로움이 한결 안정되는 것을 봐왔습니다. 나아가 '내가 가장 힘든 줄 알았는데, 그나마 나는 나은 상황이구나.'를 인정하는 과정을 거치면 주위를 둘러보는 시선도 한결 편안해하는 것을 보는 것은 제 보람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러하니, 당신!


서둘러 해가 지기도 전에 사립문을 닫지 마시길.

그 문 밖에 당신을 어루만져 줄 고운 손길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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