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끌림의 서 03화

끌림의 서 Chapter 1 피할 수 없는 외로움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by 지영Rob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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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산책길에서 만난 달팽이, 그는 절대 뒷걸음치지 않았어요.>



상담으로 만났던 20대 청년이 문득 나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20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세요?"

질문을 받고 나는 잠시 살짝 멍해졌습니다. 왜냐하면 한 번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그리운 듯도 하지만 결코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니, 20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그때 나는 어릴 때부터 노력하고 평생 바랬던 것을 IMF로 박살이 나는 경험을 했고 날아보기도 전에 날개가 꺾인 채로 20대를 견뎌야 했어요. 너무 이 악물고 치열하게 성실하게 버틴 20대는 다시 겪고 싶지 않아요. 그만큼 했으면 충분했다고 봐요."

라고 자조 섞인 답을 하며 '나는 현재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웃었습니다.


한편 딱 20년 전의 나를 만난다면 어떨까요?



어릴 때부터 메모며 일기며 편지며 기록하는 것이 습관이었는데, 그것들을 쓸 때는 열심히 쓰고는 그 시효가 끝나면 웬만해선 들춰보는 일이 별로 없는 편입니다. 그렇게 나에 대한 기록은 쓰이기만 한 채로 보관하고 있었는데, 20년 만에 살던 집을 떠나 이사를 하게 되면서 짐 정리를 하게 된 날이었습니다.


꿈은 포기했지만 꿈을 꾸면서 노력했던 것은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박스 안에 봉인된 채로 20년 간, 방치했습니다. 나이의 앞자리가 두 번 바뀌고 그 봉인된 박스를 열 때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이었습니다. 무엇이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공격할지 무방비한 상태였다고나 할까요?


내 노력의 결과물을 보게 되니, 그때의 열정과 그만큼의 모자람이 보여 쑥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같이 작성한 메모, 참고할 만한 무언가를 참 열심히도 모아둔 것을 보니 그 서투른 열정이 사실은 짠했습니다.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어렴풋하게는 알았을 텐데 거기까지 도달하기에는 한참 부족한 상태를 그때의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알아볼까 자존심만 앞서는 자기 열등감이 충만했던 시절이었음을.



그러다 다이어리를 들춰보았습니다. 나를 공격한 것은 내 노력의 결과물이 아닌 그 다이어리였습니다. 가끔 일기를 긁적이고 단상을 적어 내려 가고 읽고 있던 책을 기록하며 어느 카페의 코스터에 날짜를 적고 짧은 메모를 적은 것을 끼워 넣고 친구들과 당시 유행하던 스티커 사진 찍은 것, 아버지의 필체가 남은 메모 같은 것들을 깨알같이 모아놓아 터질 것 같은 다이어리였습니다.


불시에 눈을 찔린 것 같았습니다. 20년 전의 내가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20년 후의 나에게 꽂아놓는 느낌이라 할까요? 켜켜이 쌓인 먼지를 닦으며 하나씩 다시 살펴보는데 그때 내가 가졌던 감상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것은 그저 "애틋함"이었습니다. 다른 표현 없이 그때의 내가 너무 애틋해서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생을 너무나 멋지게 살아내고 싶던 20대의 내가, 내게 주어진 환경이 풍족하지는 않았어도 세상을 믿으려 애쓰던 내가 낡은 박스 안에서 여전히 파닥이며 살고 있었습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나 뚜렷해서 그것만 보고 살고 있는 다이어리 속의 내가, 또 그것을 점차 놓아야 해서 좌절하는 내가 되었습니다. 망망대해에 한순간 놓쳐버린 방향키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열심히 나아가게만 합니다.

그때, 쓰인 단어와 문장은 모두 눈물이고 처음으로 맞닥뜨린 세상이라는 벽 앞에서 무력한 청춘은 내딛는 걸음마다 외로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삶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는 못해 외로운 그 청춘이 어찌 애틋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애틋한 그 청춘의 내가 위로받은 글귀를 다이어리에 옮겨 적어 놓은 것을 가져와 봅니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 박경리 [토지] 서문 중에서-



다시, 지금의 내 나이. 20년 전의 나와 같은 청춘들을 보게 되니, 모두 애틋합니다. 내가 나를 그렇게 여기듯이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순해집니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 뚜렷할수록 세상이 때리는 어퍼컷은 세고 상처는 깊을 것입니다. 흉도 진하겠지요.

나에게 질문을 했던 나의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던 20대 청년은 느리지만 자신이 원하던 것을 결국 이뤘습니다. 그 청년은 이제 30대가 되었을 텐데, 어떤 마음으로 30대를 버티며 사는지 보고 싶고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러하니 당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달팽이와 같을지라도 그 길을 가시길.

우리에게 필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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