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학교 하랑 EP 5
온갖 러브콜을 적당히 쳐내며 학교생활을 하던 그녀는 어느 날 방과 후의 텅 빈 미술실로 마법에 걸린 듯 걸어 들어갔습니다. 학생들이 분주하게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는 모습이 차창밖으로 보입니다. 언제 시끄러웠냐는 듯 차가운 적막함만이 먼지 가득한 미술실 나뭇바닥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비어있는 의자에 가서 앉았습니다.
눈을 감고 숨을 후~ 들이쉽니다. 이내 하~ 크게 내뱉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보고 있지 않기에, 원하는 모습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연필을 사용해서 빈 도화지를 천천히 채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고요한 미술실이 사각사각 연필의 발걸음소리로 덧칠되어 갑니다. 어느새 땅거미가 진 운동장은 어둠을 몰고 오며 미술실로 스며들듯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후.. 재밌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그림에 몰두하던 소녀는 이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소 지었습니다. 마치 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가 도화지 속에 비쳤습니다. 생명을 담아준 화가에게 인사하듯 그림 속 소녀의 눈이 반짝입니다. 멍하니 그림을 바라보던 소녀는 갑작스레 어깨 위에 올라오는 손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왁! 뭐야!”
“우와.. 내가 더 놀랬다야… 와 전교회장님. 그림도 장난 아닌데? 살아 숨 쉬는 거 같아!”
인기척은 내고 다니라고 따져 물으려던 소녀는 이내 뒤를 돌아보다 목까지 차올랐던 말을 삼켰습니다. 그녀가 그렸던 그림 속 소녀와 같이 반짝이는 눈을 가진 소녀가 밝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스트레스를 받더니 드디어 미쳐가기 시작했나? 소녀는 눈을 부비적 거리며 그림과 뒤에 있는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았습니다. 자세히 보니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자신과 같은 교복과 노란색명찰을 차고 있는 소녀의 옷을 보며 이내 그녀가 자신과 같은 학년의 동급생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 속 소녀와는 머리길이도 달랐고 다시 보니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녀의 화사한 웃음과 반짝이는 미소는 그녀가 그렸던 그림과 똑 닮아 있었습니다. 소녀는 절대 짓지 못할 것 같은 그런 웃음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또르르 흘러내립니다.
“나도 미술을 좀 하는 편이거든. 자랑은 아니지만 말이야~”
해바라기 같은 소녀가 콧김을 흥흥 뿜어내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합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앉아있는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습니다. 소녀는 멍하니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습니다. 말랑말랑 갓 구운 빵처럼,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있을 것 같은 손. 언제나 목적을 가지고 자신에게 내밀어지던 손들과는 다른 따스한 느낌만이 가득 담겨있는, 그런 손이었습니다.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손을 잡았습니다.
따뜻하고 부드러웠습니다. 손 발이 항상 차가운 그녀의 손을 싫어하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바라기 소녀는 오히려 시원해서 좋다는 듯 이전보다 더 크게 웃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습니다. 한참을 악수를 하던 소녀는 이내 앉아있는 그녀와 눈을 맞추더니,
우리, 친구 하자!
담담하게. 마법 같은 단어를 말하며 히죽 웃어 보였습니다.
그 순간 멈춰있던 소녀의 세상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즐거웠어요. 이 아이와 함께라면 나는 어쩌면, 꿈을 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날을 회상하듯 소녀의 입꼬리가 따뜻한 카푸치노 우유커품처럼 부드럽게 올라갑니다.
어쩌면 흑백영화 같았던 소녀의 세상이 조금이나마 색을 띠기 시작했을까.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일탈은 없었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있는 계단에 걸터앉아 멍하니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센다거나, 정말 용기를 마지막까지 쥐어짜 내며 야자 도중 담을 넘어 편의점을 다녀오곤 했던 누군가에겐 평범한 나날들. 그러나 그렇기에, 소중하고, 행복했고 자유로웠습니다. 시원한 소나기 안에서 비를 맞아본 적이 있을까요?
엉망진창이지만 즐겁고, 자유롭고 시원한 감정. 그녀에게 친구와 함께한 평범한 일상은 눈물이 날 만큼 기쁨과 즐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제가 놀 줄 모르거든요. 자유란, 행복이란 생각보다 가까운 걸지도?”
언뜻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지은 소녀의 눈웃음이 학교 위에 걸린 초승달처럼 아름답게 휘었습니다. 누군가에는 당연할 수 있는 일상이 해바라기소녀가 먼저 다가와줌으로써 소녀의 앞에 펼쳐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좋은 친구구만.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말이야.”
이제는 이러한 상황이 익숙하듯, 숀은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인연이지만 그렇기에 운명 같다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꿈이니까 뭐든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으며 숀은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습니다.
“은인이죠.”
소녀는 무릎 위에 얹어져 있던 두 손으로 치마 끝자락을 움켜잡았습니다. 끝단이 구겨질 듯 꽉 진 두 손이 바르르 떨립니다.
“친구가 아니에요. 저는 걔한테 친구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요.”
처음 만났던 미술실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고, 늦은 밤까지 경쟁심에 불타올라 그림에 빠져있던 마법 같던 시간은 어느 한 사건을 기점으로 갑작스레, 공기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자.. 이번 전국 미술대회는… 전교회장이 나가기로 했다! 모두 박수”
“와.. 쟤는 못하는 게 뭐냐. 근데 솔직히 쟤만큼 잘 그리는 애는 없지”
다른 학생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공기 중을 둥둥 떠돌아다닙니다.
전국 미술대회에 나가게 된 소녀는 기뻤습니다. 열심히 그렸던 자신의 그림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습니다. 푸른 장미다발을 손에 쥔 소녀가 달을 올려다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나도 저런 미소를 짓고 있을까?’
거울을 보고 싶어 졌습니다. 세상의 색깔이 가득 담긴 웃음을 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보고 싶습니다. 평생 회색빛 세상 속에 살 줄 알았던 내가 이런 사치스러운 생각까지 하다니. 그러나 거울을 보는 것보다, 그녀는 자신을 시멘트빛 세상에서 꺼내준 해바라기소녀에게 먼저 웃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제야 웃음을 되찾은 내 모습을 가장 친하고 사랑하는 친구에게 제일 먼저 보여주고자 소녀는 옆에 있던 해바라기소녀에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아..”
그러나 그곳에는 더 이상 소녀가 알던 해바라기소녀는 없었습니다.
- 6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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