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으로 산다는 것은
가을빛이 곱다. 이런 날은 무조건 집을 나선다. 무엇인가 가슴 설레는 일을 만날 것만 같아서다. 사실 요즘 그날이 그날 같아 이렇게 사는 일이 맞는가 혹 잘못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어쩌면 더 이상 가슴이 쿵쿵 떨릴 만큼 설렐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뛸 만큼 가슴 떨리는 일이 없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타성에 젖어간다는 것이다. 조금은 허허로운 일이다. 사는 일이 가슴 떨리도록 눈부셨던 때가 언제였을까?
첫 아이 낳았을 때의 가슴 떨림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출장 간 남편 대신 시동생과 함께 한밤중에 병원으로 달려가던 때의 두려움과 오랜 진통 끝에 출산한 아이. 그날은 마침 첫눈이 내리기도 했다. 기다리던 아이이기도 했지만 내게도 새 생명이 왔다는 희열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 아이는 어느새 장성해 이제 또 그의 아이를 볼 나이가 넘었다. 첫아이에게는 왠지 마음이 간다. 아마도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신비스러움과 특별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출산의 고통은 두렵고 힘들었지만, 첫 출산에 대한 황홀감은 아주 오래 지속됐다.
태어나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의 가슴 떨림도 잊지 못할 경험이다. 그때는 마침 소련 전투기가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 폭파한 후여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흥분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서울에서 프랑크푸르트와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날아갈 때의 흥분과 떨림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새롭게 다가왔다. 물론 요즘은 은빛 날개를 타고 날고 있다는 것에 별 감흥은 없지만, 혼자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남편이 근무하던 런던까지 먼 길을 비행기 갈아타며 날아갔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은 늘 가슴을 떨리게 했다. 일상이 무료하다고 느껴질 때, 사는 일이 답답해질 때 훌쩍 잘 떠났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그랜드 써클. 캐나다의 설산과 아이슬란드의 빙하. 헤이그에서 바라본 북해와 캔쿤의 석양. 이들이 주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은 오래도록 가슴을 떨리게 했다. 여행지가 어디든 일상을 떠난다는 것은 늘 나에게 미지의 세계와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들뜸으로 이어졌다.
옛사랑과 우연한 만남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30년 만에 공항에서 해후했을 때의 떨림, 그 파동은 아주 오래갔다. 가슴이 떨려 한동안 숨을 쉴 수 없었다. 얼굴을 마주할 수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시 추억 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 이제는 어디선가 스쳐 지나간다 해도 그 떨림은 크지 않을 것 같다. 누군가를 다시 만나는 일이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슬픈 일이다.
우주를 여행하는 일,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는 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는 일. 어떤 일은 너무 요원해서, 어떤 일은 불가능해 보여 가슴이 그리 떨려오지 않는다. 심장이 떨릴 만큼 아주 먼 미지의 여행을 떠날 일도 없을 것 같다. 어쩌면 평범한 일상에서 작고 소소한 기쁨으로 대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스탕달 신드롬(뛰어난 예술품을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느끼는 정신적 육체적 떨림 등의 반응)까지는 아니더라도 설렘을 기대하며 갤러리를 찾아다니는 일, 동네 공원에서 새롭게 발견한 식물의 이름을 찾아보고 그의 내력을 살펴보는 일에서 설렘을 기다리기로 한다.
작정 없이 걷다 보니 장지 근린공원 숲이다. 한창 공사 중이던 노천극장이 어느새 완성되었다. 무대도 있고 객석도 있다. 무대에 올라가 아무도 없는 객석을 바라보며 혼자 연극 대사를 읊어본다. 내년 봄쯤에는 이 노천극장에, 노래와 음악과 춤과 개그가 넘쳐날 것이다. 어린이 청소년 노인들까지 한바탕 놀아보는 시간이 올 것이다. 무대 위에 서 있을 나를 상상하며 잠시 설레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