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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Feb 08. 2023

오늘도 꽃들은 말한다

식물과 나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속, 남자 주인공은 아침마다 출근하기 전에 화초에 물을 준다. 말없이 화초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음 짓고 고개를 끄덕인다. 분명 서로 말을 주고받는 것이리라. 시부야 공원 화장실 미화원인 히라야마 마사키. 출근하는 자동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의 올드 팝을 듣고 필름 카메라로 나무 사이의 햇살을 찍는다. 일과가 끝나면 동네 목욕탕에서 목욕하고 단골 식당에 가서 술 한 잔을 마신다. 어찌 보면 그날이 그날이다. 다음 날도 화초에 물을 주고 하늘을 바라보며 집을 나선다. 똑같은 하루가 또다시 주어진 것에 웃음 지으며. ‘퍼펙트 데이즈'란 결국 자족하는 삶이라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화초들이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라고, 오늘도 완벽한 하루가 될 거라고 그에게 속삭였듯이….


 나도 식물을 참 좋아한다. 어느 누가 꽃과 나무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지만 좀 병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어머니날이나 생일날이 되면 유치원에 다니던 작은 아이가 묻곤 했다. ‘엄마! 무슨 선물 받고 싶어?’ 하면, 난 어김없이 ‘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이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꽃은 금방 시들어버리는데, 엄마는 왜 꽃을 좋아하지?’ 하며 실망하는 눈치였다. 아마 어린아이 눈에는 금방 생명이 끝나 버리는 꽃보다는 오래 두어도 변치 않는 물건이 더 값진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가끔 초대받아 오는 지인들이 가져오는 와인이나 케이크도 좋아하지만, 꽃을 선물 받을 때가 더 기쁘다. 굳이 화려한 자태의 이름 있는 꽃이 아니더라도 살아있는 들꽃이나 풀꽃이면 족했다. 태생이야 어떻든 살아있는 꽃은 아름답고 그들에게서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나름의 향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전셋집이든 내 집이든 큰 집이든 작은 집이든 이사 갈 때마다 꽃분을 사들였다. 고무나무, 철쭉, 치자나무, 영산홍, 제라늄, 수국들이 당당하게 자리 잡았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화분들을 죽 둘러보는 일이 일과의 시작이다. 식탁 옆에 화분대가 있으니 피해 갈 수도 없는 일이지만, 밤새 잘 지냈는지 물은 주어야 하는지 시든 꽃잎은 없는지 조심스레 살펴본다. 옆 사람은 ‘무얼 그리 혼자 열심히 중얼거리세요?’, 때로는 ‘거기서 밥이 나오나요, 돈이 나오나요?' 하고 묻지만 내 나름대로 식물과 인사를 나누는 방법이다. 물론 돈이나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돈을 쓰고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비 내리는 날이나 울적한 날, 꽃집에 시선이 자주 가는 것도 오래된 습관이다. 주머니가 넉넉하면 화분 하나를 사 오기도 한다. 그 화분 하나에 마음이 환해지기도 하고 부자가 되기도 했다. 물론 반찬값 생각하느라 마음에 드는 화분 하나 맘껏 살 수 없었던 지난한 시절도 있었다. 우울한 시절, 내게 위로를 주었던 꽃분들. 요즘 반려 식물이란 말이 있지만 오래전부터 꽃이나 푸른 식물은 나의 반려였지 싶다.     

  

 꽃분들은, 매일 들여다보고 말을 걸고 정성을 들이면 신기하게도 잘 자라준다. 여름이면 나도 함께 푸르러지고 싶어 무성한 잎의 식물을 탐했고, 겨울에는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꽃나무를 키웠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식물 가꾸기는 그사이 죽어 나가기도 하고 지인의 손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떠나간 그들의 생사를 알 길 없지만 사는 내내 꽃분들은 내게 행복을 나누어 주었다. 

 죽은 덤불 속에서 머리를 내미는 들꽃이나 길바닥을 헤집고 나온 풀을 보면 마치 소중한 것이라도 발견한 듯 달려가 들여다보는 일을 왜 좋아하는 걸까? 어쩌면 그들에게도 생명이 있다는 것, 계절이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처럼 생로병사를 겪으며 살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식물도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과 찬란함 그리고 지고 난 후 다가오는 쓸쓸함이 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의 꽃송이 이파리 때로는 열매 하나라도 버리면 안 될 것 같은 공손한 마음이 들곤 한다.      


 따사한 겨울 볕이 내리는 창가, 고구마 덩굴이 키를 세우고 있다. 버리기에는 초록빛이 아까워 수염 다발만 만지작거리다 뿌리의 반쪽을 잘라내고 볕 든 자리에 내려놓았다. 심장이 강하다면 반쪽을 도려내도 살아낼 것으로 생각했다. 우리의 삶도 한 번쯤은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붙잡아 줄 뿌리 한 개쯤 남아있다면 쉽게 목숨을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뿌리 있는 것들은 그리 쉽게 제 생을 버리지 않는다. 우리 모두에게도 목숨을 이어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발길질이요 살아낸다는 것은 찬란한 몸부림이다. 그동안 나에게 소소한 행복을 주었던 식물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마지막 겨울을 버티려 한다.    

  

 지상 위의 생명들은 아직 겨울이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의 몸짓을 보는 일은 신선하다. 이제 곧 금빛 물결로 일렁일 수양버들을 생각하면 가슴은 어느새 푸르러진다. 땅, 불, 바람, 물, 마음이 있는 곳이면 어떻게든 살아남는 식물들. 어디선가는 오늘도 생명이 사라지지만 어디선가는 또 다른 생명이 숨 터올 거라는 희망과 기다림으로 이월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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