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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Nov 14. 2022

잠시 쉬어가도 좋은 달, 11월에게

위로와 찬사가 필요한 달

 

 백화점 정문에는 어느새 'Christmas Dream Moments'라는 장식 문구가 붙어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리 재촉하지 않는 것 같다. 어쩌면 나처럼 오래 머무르기를 아니면 더디 가기를 바라는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서울의 11월은 아직 눈부시고 황홀하다. 

 선배와 함께 점심을 하고 옥상정원으로 향했다. 하늘이 보이는 정원에는 몇 그루의 자작나무가 11월을 맞이하고 있었다. 생채기를 드러낸 얼굴들이 마치 부처의 미소를 닮아 있었다. 문득 웅장한 사암의 절벽도 거대한 협곡의 절경도 아니지만 작은 몸짓으로 심장을 강타했던 유타주 산등성이의 자작나무 숲이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 해 11월의 시간들이 풍경 안으로 들어왔다.


 뉴욕의 11월은 늘 서성대기 일쑤였다. 10월의 끝에는 언제나 크리스마스 캐럴이 기다리고 있었고 11월이 시작되면 방송마다 ‘저스트 어라운드 코너, 메리 크리스마스 앤 어 해피 뉴 이어’를 연발하며 캐럴을 들려주고 소비와 축제를 부추겼다. 늘 궁금했다. 아직 남아있는 달, 11월은 정녕 없는 것인가 하고. 이른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는 아직 계절을 건너오지 못한 사람들에겐 숨 막히게 때로는 잔인하게 들리기도 했으니까. 

 그 해 11월 그가 큰 수술을 받았다. 휠체어를 탄 그가 희미한 손을 흔들다 수술 방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이 기다리는 라운지, 무슨 말도 아직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지 않음을 알기라도 한 듯 모두들 피곤을 눈감고 있었다. 문득 의자 너머 기도를 올리고 있는 두 눈과 마주쳤다. 그 작은 눈도 나와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도 수술방의 초록불은 들어오지 않고 오래된 낡은 전등만 천정에서 간간이 흔들릴 뿐 병원 밖은 어느새 새벽어둠을 지나온 정오 햇살이 따뜻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창 밖 거리는 병원 안 피곤한 발걸음들에 비해 힘차고 당당해 보였다.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걸음걸이가 부럽기도 했다. 맞은편 코너에는 뮤지컬 박스를 샀던 파피루스 가게도 보였다. 쇼윈도에는 온통 세일, 세일이라 붙여 놓았다. 그때도 참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처 준비하지 못한 성탄선물을 ‘세일 세일’에서 살 수 있듯 이미 놓쳐버린 시간들을 세일하는 곳은 없을까 아쉬워했던 기억이 있다. 오후 무렵에야 회복실 방에 노란불이 들어왔다. 그의 한쪽 눈은 붕대로 감겨 있고 다른 한쪽 눈은 초점을 읽은 채 회복실로 이동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가 저 오렌지 향기 나는 오후 햇살을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 아닌 기도만을 되씹고 있었다. 화려한 12월 그늘 밑에 쓸쓸히 서있던 11월, 그해 11월은 참 많은 위로가 필요했던 계절이었다. 

 


  11월은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 성월'이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11월은 앞서간 영혼을 위로하고 싶은 달이다. 남은 시간에 대한 감사와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달이기도 하다. 어둠을 밝히는 크리스마스트리도 평화를 기도하는 미사 송가도 11월의 서른 밤을 건너지 못하면 당도할 수 없는 축제, 느린 걸음으로 달려오는 작은 것들의 소리를 기다려주는 11월 앞에서는 잠시 쉬어가도 좋겠다. 잘 버티어온 발걸음들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은 달, 남은 11월은 아껴 쓰고 싶다. 사고와 참사로 가족을 먼저 보낸 이들과 함께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중 '님로드(Nimrod)'를 듣고 싶은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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