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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by 임반짝 Mar 13. 2025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어떤 경로로든 예감이 발현되면, 그 후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은 어김없이 그쪽으로 흘러든다. 여러 물줄기가 종내에는 한곳으로 모여드는 것처럼. 그날도 그랬다. 


 곰솥에 받아 든 물이 조금 많았다. 생닭을 넣자, 냄비 솥 물은 힘껏 넘실댔다. 물을 살짝 따라낼지 망설이다 그대로 하이라이트 위에 냄비를 올리고 뚜껑을 닫은 뒤 냄비 손잡이에 붙은 잠금장치를 뚜껑 위로 밀어 올렸다. 하이라이트 전원을 켜고 돌아서는 순간 예감은 발현되었다. ‘위험해.’ 냄비 속 물이 팔팔 끓어오르면 뚜껑은 물의 힘을 막아서다 끝내 튀어 오를 것이라는 나쁜 예감은 몸에 이미 새겨져 있었으니까.      


 예감이 친절히 경고하였음에도 그냥 돌아선 것은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일까? 냄비에 받은 물은 정량이었다는 자기 세뇌? 냄비 뚜껑이 용암 같은 물을 이길 것이라는 순일한 믿음? 어리석기까지 한 이 천진한 믿음은 30분을 채 넘기지 못했다. 물이 끓어오르자, 냄비 뚜껑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수증기와 물방울이 냄비 뚜껑의 빈틈으로 마구 뿜어져 나왔다. 옛날 만화영화 속 잔뜩 화가 난 용의 콧구멍처럼. 나는 그 순간, 어째서 분노에 들썩이는 냄비 뚜껑을 내 힘으로 누르는 선택을 했을까? 예감의 발현과 선택 사이에 작용한 힘의 정체는 여전히 미지수다. 들썩이는 냄비 뚜껑을 두 손으로 누르다 이내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냄비 뚜껑을 누를 것이 아니라 하이라이트의 전원을 꺼야 했다. 깨달음은 항상 일이 벌어진 후에야 도착한다. 쓸리고 벌어진 상처 위에 시간이 지난 뒤 새살처럼 연하게 돋아나는 것이다.      


 냄비 뚜껑은 폭발했다. 닭 한 마리의 기름을 품은 진득한 육수가 온천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것은 나의 맨 허벅지를 내려치고 두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바깥 하늘로 빠져나가지 못한 수증기가 주방 벽을 따라 비로 내렸다. 순간 두 다리로 흘러내리는 기름진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젖은 덧버선이 발바닥에 달라붙자, 그제야 육수의 뜨거움이 순식간에 두 다리로 퍼졌다. 들러붙은 덧버선을 양파 껍질 벗기듯 떼어냈다. 화장실 욕조에 들어가 두 다리를 길게 누이고 샤워기로 찬물을 뿌렸다. 그러나 벌겋게 달아오른 허벅지는 샤워기의 수압에 밀려 이미 피부가 말려 올라갔다. 껍질이 벗겨진 허벅지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 나왔다. 어린 날 시멘트 바닥에 갈린 무릎에서 피가 스멀스멀 배어 나오듯.     


 난생처음 누워서 바라본 응급실의 천장은 무척이나 환했다. 눈부신 형광등을 무기로 의사가 상처 너머의 내면과 그 이면까지 샅샅이 뚫어볼 것만 같았다. 초여름날 저녁, 백숙 국물을 뒤집어쓰게 된 어리석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도 잠시, 다행히도 의사는 그 경위를 궁금해하지 않았고 화상은 시간이 지나야 다친 정도를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미 피부가 벗겨진 것으로 보아 표재성 2도 화상 상태이고, 이것이 심재성인지 아닌지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표재성 화상과 심재성 화상의 차이는커녕 그 개념조차 처음 들어보는 나로서는 무엇을 먼저 질문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저 ‘그러면 제 다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는 멍청한 질문만 입안에 고였다. 어쩌면 그것은 삶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을 고스란히 덮어썼을 때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나는 어쩌면 좋죠?’라고, 어딘가에 있을 신에게 묻는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은 예상하고 예정하는 존재니까.     


 두 다리 전체에 화상 시트를 덮었다. 열을 뿜어내는 두 다리와 같이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다리가 뜨거워 심장이 뛰는 것인지 심장이 뛰어서 다리가 뜨거운 것인지 그 인과관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열기가 더 이상 몸속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열을 식히는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가만히 누워 다만 천장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병렬로 줄 지어진 기다란 형광등과 천장의 무늬를 눈으로 따라갔다. 언젠가 응급실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때 아빠가 보았을 천장의 무늬는 어땠을까. 할머니가 본 무늬는 무엇이었을까. 아빠도 무서웠을까? 할머니도 심장이 벌렁거렸을까?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지만, 예상은 빗나가기 마련이다. 고통이나 상처, 질병과 죽음 같은 일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고 심상하게 예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냄비 뚜껑이 열리고 백숙 국물이 넘칠 것은 예감했지만, 그 국물에 델 것을 예상하지 못한 나처럼 인간은 두려움이 온몸에 산재한 것치고 어리석을 만큼 호기롭기도 하니까. 예상하지 못한 일을 예감하며 응급실의 천장을 바라보았을 그들의 마지막 마음은 어떤 무늬였을까.   

   

 열을 식힌 후 참기름 냄새가 나는 화상 연고를 두 다리에 펴 발랐다. 오른쪽 허벅지와 양 발등에 습윤 패드를 붙이고 허벅지부터 발가락까지 붕대를 감았다.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난 미라 같은 다리로 땅을 딛자, 발끝부터 허벅지까지 신호가 켜지듯 화끈거렸다. 갓 뽑아 참기름을 펴 바른 절편 같은 다리로 밤새 인터넷 화상 카페를 검색하며 상처가 ‘떡살’이 될까 봐 불안에 떨었다. 한 달의 치료 끝에 내가 받은 판정은 표재성 2도 화상이었다. 일명 ‘떡살’이 될 정도의 심재성 화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커멓게 죽은 껍질이 벗겨지고 벌겋게 드러난 속살은 땀구멍 하나하나가 제 고유성을 알렸다. 상처는 옷에 쓸리고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오므라지고 펼쳐지며 끊임없이 제 존재를 상기시켰다.      


 두 번의 계절이 지나고 그것은 손바닥만 한 하트 모양의 흉터로 남았다. 그날 다리와 함께 떨었던 심장이 허벅지에 가 박힌 것 같다. 거뭇한 둘레 안은 퀼트처럼 결이 다른 피부로 기워졌다. 흉터를 볼 때마다 그날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치 일기장 같다. 일기장에 남몰래 써 놓은 그날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날 응급실 침대에 누운 내 얼굴에는 두려움과 안도가 공존했다. 천장의 무늬를 따라가며 미지의 두려움에 떨면서도, 병원 침대에 누웠다 사라진 아빠와 할머니와 달리 나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감하고 예상하며 안도했다.    

 

 상처에 소스라치게 겁을 먹는 것은 내면이 무방비 상태로 드러날까 봐서일지도 모른다. 껍질로 가려둔 내면이 쓸려 스멀스멀 피가 배어 나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다치고 뜯기고 갈리는 고통을 어떻게든 피해 가고 싶은 것은 본능일 것이다. 어쩌면 나는 아빠와 할머니가 이 세계에서 떠났을 때조차 나의 고통을 먼저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소멸하면서 느꼈을 아픔과 두려움보다 그로 인해 내가 느끼는 슬픔의 고통에 더 크게 빠져있었던 것일지도.     


 다시 오른쪽 허벅지에 기워진 하트를 보며 생각한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큰 근육이라는 허벅지 근육을 단련하면 나의 심장도 단단해질까. 나쁜 예감에 쿵쿵쿵쿵 떨지 않고 그것에 펄떡펄떡 맞서는 심장으로 앞으로의 삶을 가눌 수 있을까. 그리하여 상처를 ‘떡살’로 만들지 않고,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이 어우러진 생의 무늬로 의연히 새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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