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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꼬불 나선으로 이어진 것들

by 임반짝 Feb 18. 2025


 “라면 먹을래.”

 중학생이 된 아이의 저녁 전 간식이 라면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학교와 학원 사이, 그 틈을 영양이 충족된 간식으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은 라면 앞에서 언제나 지고 만다. “라면 따위를 매일 먹어서 어쩌자는 거야?” 볼멘소리는 재채기처럼 참지 못하고 기어코 입 밖으로 방출된다. 오늘은 학교에서부터 집에 오면 바로 라면 먹을 생각만 했다는 아이의 말에 마음마저 꼬인다. “수업 시간에 집중은 안 하고 라면을 생각하는 게 맞아?” 도덕적 잣대까지 들이대는 꼬인 목소리에 아이의 표정도 뒤틀리고야 만다.

    

 라면 하나에 서로의 부당함을 주장한 지도 한참이 되었다. 아이는 제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권리를 왜 막아서냐고 항변했다. 권리장전을 들이미는 혁명가와 미성숙한 시민에게 독립된 권리를 승인해 줄 수 없다는 독재자는 언제나 평행선을 달린다. 고작 라면 하나에 어째서 아이와 나의 관계가 라면 면발처럼 꼬여버린 것일까.     

 

 꼬불꼬불 나선으로 이어져 한데 뭉쳐진 라면처럼 아이와 나는 탯줄로 이어졌었다. 아이가 나의 배 속을 빠져나오며 끊어진 탯줄이 꾸덕꾸덕하게 말라갈 즈음 그것은 화학 용액에 담겨 아이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 안에 사리처럼 안치되었다. 탯줄은 그 상태 그대로 보존되어 한동안 아이와 나를 한 몸인 양 친친 감았다. 그런데 아이가 라면을 거의 매일 먹기 시작했을 때쯤부터 줄이 서서히 풀리고, 우리는 어느덧 각자의 몸으로 분리되었다. 나를 거쳐 세상을 알던 아이는 핸드폰과 친구를 통해 세상과 직선으로 이어졌다. 아이와 세상을 잇는 곧은선에는 엄마보다 핸드폰과 친구들의 기록이 점점 더 많이 새겨졌다. 아이는 라면의 면발을 타고 저쪽으로 미끈하게 넘어갔다. 반면 아이와 나의 관계는 라면처럼 꼬불꼬불 꼬이며 길을 잃었다.     


 활어를 잡아먹는 수달처럼 신나게 면발을 후루룩거리는 아이를 보는데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부모의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유를 대자면 내 쪽에서도 할 말은 차고 넘친다. 오후 4시에 라면을 먹은 아이가 7시에 차려놓은 저녁밥을 제대로 먹을 리 없다. 라면 때문에 저녁밥을 하루 이틀 거른다고 당장 큰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쯤 알고 있다. 내가 차려주는 밥이 맛과 영양 면에서 ‘완전 음식’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이를 먹이는 것이 나의 할 몫이라는 사명감이, 하루의 끝에 함께 앉아 수런거리는 저녁 시간이, 고작 라면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라면 때문에 깨진 리듬이 우리들의 앞으로의 시간을 통째로 지배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다. 예감은 틀리지 않으니까. 예감은 살아온 날들이 알려주는 신호니까. ‘집밥’에서 풀어진 줄은 얼레를 당겨도 자꾸만 느슨해져 종내에는 멀어지고 말 것이다.     


 “너, 그렇게 신나게 라면 먹을 때야? 이러다 학원 늦겠는데?”

 “괜찮아. 안 늦어.”

 아이는 어느 곳에서나 공평하게 흐르는 시간의 리듬을 혼자 다르게 타는 듯하다. 분침의 움직임을 놓칠세라 시계를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내 쪽이다. “이제 진짜 나가야 하지 않을까?” 목소리를 불퉁거리지 않으려 눌러 보지만 꼬아지는 목소리를 감지한 아이는 어김없이 대답이 없다. 무음으로 제 의견을 표출하는 아이와 반드시 육성으로 답을 들어야 하는 나는 또다시 평행선에서 가속도를 올린다.

 “정신 차리고 빨리 나가라고!”

 “가면 되잖아!”     


 아이를 먹이고 키우는 것. 탯줄을 끊고 내 배 속에서 나온 아이를 마주했을 때 그것이 나의 할 몫이라 생각했다.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다만 내 엄마랑은 달리 아이와 친구가 되리라 생각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아이에게 그냥 엄마가 되었다. 함께 붙어 있던 거실은 어느새 나 혼자 남았다. 아이는 제 방이 요새인 양 밥때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인사 대신 거친 문소리를 내고 집을 나간 아이는 학원 수업이 끝날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다. 아이가 좋아하는 씻은 묵은지와 최대한 저민 수육이 한풀 식어갈 때쯤 ‘단어 시험 통과 못 해서 재시야. 집에 늦게 가.’라는 문자가 아이 대신 도착했다.   

  

 평소보다 한 시간가량 늦은 아이를 보며 꽈배기 같은 마음이 입 밖으로 불퉁하게 튀어나오지 않도록 단속했다. “수육 다 식겠다. 손 씻고 와서 얼른 먹어.” “나 지금 배 하나도 안 고픈데….” 목소리가 울퉁불퉁 불거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다행히 아이는 20분 뒤에 먹겠노라 말하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20분 뒤 데운 밥을 식탁에 올리고 아이를 부르자 아이는 웬일로 한 번에 대답하며 방을 나왔다. 권태기의 연인들처럼 서로의 눈치를 보며 식탁에 마주 앉았다. 관계의 회복에 일말의 희망을 품은 그들처럼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고 신중하게 질문을 골랐다.

 “더 식으면 맛없으니까 얼른 먹어.”

 “엄마 ‘쿨’ 노래 알아? ‘애상’.”

 “애상? 그거 엄마 어릴 때 노랜데 어떻게 알았어?”

 “인스타로 봤지. 좋아서 쉬는 시간에 계속 들었어.”

 “아‥ 엄마도 좋아했지. 근데 오늘은 왜 또 재시야? 진짜 영어 이름 ‘제시’로 바꿔야겠다.”

 “한꺼번에 50개씩 시험 치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앞으로는 한 번에 100개씩 외워야 할 일만 있을 텐데? 그러니까 아까 라면 먹지 말고 시험공부를 했어야지! 제대로 안 했으면 쉬는 시간에 노래 듣지 말고 단어를 외웠어야지!”

 “하‥ 나도 알아! 라면 먹어서 입맛이 없어. 밥이 너무 많아. 고기도 너무 두꺼워. 남기면 안 돼?”

 “할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밥도 똑바로 안 먹고 정말 뭐 하는 거야?!”

 “밥 안 먹어!”

 권태기의 연인들은 사랑의 결락을 재확인했을 뿐이었다. 고작 라면 때문에 가느다랗게 이어진 줄마저 싹둑 잘렸다.           


 영양학적으로는 ‘불완전 음식’인 라면이 인간의 만족감이라는 측면에서는 ‘완전 음식’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탱글탱글한 면발이 입안을 휘감고 돌 때, 짭조름한 국물이 칼칼하게 목구멍을 적시며 넘어갈 때의 맛과 기분은 가히 완벽하다. 이것이 라면의 본태이다. 아이가 라면을 매일 먹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러니까 ‘시험’이라는 수단으로 아이에게 점수가 매겨지기 시작할 때부터, 탯줄로 영양을 이어주고 감정을 전달할 때처럼 아이와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고 싶었던 마음은 본디의 모습을 잃었다. 제가 관심 있는 것을 내보이는 아이에게 반가운 공감보다 매복했던 힐난이 먼저 튀어 나갈 정도로 장막이 쳐졌다. 아이와 주욱 친구처럼 연결되기를 바라던 내 마음은 어디로 갔을까? 사랑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은 상실이다. 잃어서 없어진 것만이 그 자리에 물 자국처럼 남는다. 완전하고 완벽한 음식, 라면에 승복해야 한다. 본태로 돌아가 다시 아이와 꼬불꼬불 나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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