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와 강
‘넓고 길게 흐르는 큰 물줄기’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조카는 20개월 차 인생의 강을 건너고 있다. 아기는 흘러드는 물줄기를 너르게 품어내는 자신의 이름을 ‘앙이’라고 발음한다. 아직 단련되지 않은 순한 혀는 기역처럼 각진 발음보다 이응처럼 둥근 발음이 더 쉽기 때문일 것이다. ‘앙이’의 입에서는 사과와 수박이 ‘아과’와 ‘우박’이 되어 오물거린다. 연한 소리를 발음하느라 작고 둥글게 오므려지는 입술이 무구하다.
아기의 작은 손가락은 마론인형의 그것처럼 흠난 곳 없이 말랑하다. 보드랍고 무른 손가락은 제 앞에 놓인 모든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눠주듯 그것들을 살뜰하게 조몰락거린다. 이때 턱으로 진득하게 흐르는 침은 주무르는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입이 아닐는지. 아기의 얼굴에는 이응처럼 연한 것이, 침방울처럼 투명한 것이 표표히 묻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이 연한 얼굴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 무언가에 절여지지 않은 무해한 것이었을 때 가졌을 연한 얼굴. 나는 그 연한 것이 순하게 오물거리는 얼굴을 언제부터 못 보게 된 것일까? 사춘기에 충실히 복무하다 못해 스스로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가 된 중학교 1학년인 첫째 아이는 자아를 성난 얼굴로 깨닫는 중인 듯하다. 뾰족한 눈과 날카로운 입을 날마다 갱신하며 얼굴을 딱딱하게 단련하고 있다. 어쩌면 인생이란 연하고, 순하고, 투명한, 둥근 얼굴을 잃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 과정의 조력자가 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 또한 인생의 과정인 것 같다. 빗각을 세운 사춘기와 사십춘기의 공존은 강을 자주 범람하게 한다.
장난감 자동차를 조몰락거리던 ‘앙이’가 이제 정리하자는 제 아빠의 말에 손을 멈췄다. 제 아빠가 장난감을 상자에 집어넣는 행동을 지켜보더니 이내 무른 손으로 장난감을 주워 담았다. 제 주변에 있는 장난감을 하나씩 주워 담다가 급기야 양손에 장난감을 가득 들어 올려 상자에 던졌다. 상자 속 장난감들이 거세게 부딪쳤다. “강아, 살살.” 모두들 앙이에게 ‘여리게 여리게’로 말했다. 그러자 앙이는 포르티시모로 부딪히는 장난감 소리를 피아니시모로 바꾸는 마법을 부렸다. 앙이는 마법사다.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따라하며 제 모습을 수시로 변신시킨다.
장난감을 다 주워 담은 앙이가 족히 5kg은 될 법한 장난감 상자를 들어 올렸다. 모두가 일제히 앙이에게 응원의 소리를 보냈다. “우와~ 강이 힘세다. 우와~ 강이 대단하다.” 사전에 합의한 적 없지만 그 자리에 있는 자로서 응당 해야 할 말이라는 듯 일제히 소리쳤다. 딱딱한 얼굴로 사춘기에 복무 중인 첫째 아이조차 응원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무른 아기 앞에서 날카로운 눈과 뾰족한 입을 순하게 둥글리느라 저도 어색함이 물큰한 얼굴이었다.
응원자로서의 연기가 스스로도 생경한 듯한 아이에게 나는 아기와 같이 장난감 상자를 들어주라고 말했다. 응원자가 장난감 상자의 손잡이를 앙이와 한쪽씩 나눠 들었다. 응원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앙이의 손에는 미세한 무게만 쥐어지도록 힘 조절을 했다. 앙이가 장난감 상자의 진짜 무게를 알지 못하도록. 둘은 장난감 상자가 원래 있던 방까지 순례의 길을 가는 수도자처럼 하나 둘 하나 둘 걸음을 내딛었다. 응원자의 보이지 않는 배려를 모르는 것이 분명한 앙이는 스스로 무언가 해내고 있다는 사실에 얼굴이 한껏 상기되었다.
‘트루먼쇼’가 아닐 수 없다. 진지하게 장난감 상자를 옮기는 앙이는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의 ‘트루먼’이다. 이 쇼의 성공을 위해 조력자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혼신의 연기에 동참하고 있다. 장난감 상자가 아주 무겁다는 듯이. 이 무게를 감당하는 네가 무척 대견하다는 듯이. 트루먼이 제 삶에 진지한 만큼 조력자들도 이 연극에 진지하다. 조력자들이 이토록 충실하게 역할에 복무하는 것은 트루먼이 언젠가 느낄 인생의 진실을 앞서 거쳤기 때문이 아닐까.
아기의 무해함은 자신을 둘러싼 조력자들의 응원으로 지켜지는 것 같다. 다정한 관심과 진한 애정으로 아기는 연하고 순한 존재로 지켜진다. 그렇다면 주인공이었던 아기가 어느 순간 주변인으로 내쳐지는 것은 왜일까. 트루먼의 자리에 있던 나의 아기는 언제부터 조력자의 자리로 건너와 저보다 작은 존재가 주인공인 이 연극에 동참하기 시작한 것일까. 아이는 아기 때의 순한 얼굴을 언제 어디에 왜 버렸을까. 매순간 다정한 응원을 보내지 않았던 원조력자 탓일까. 아기와 있을 때 데크레센도가 되는 아이를 보면서 사춘기는 ‘나는 누구인가?’에 천착하는 시기가 아니라 ‘엄마는 왜 저럴까?’라는 대한 의구심에 의해 발현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집 안의 온갖 물건을 주무르던 앙이의 맑고 까만 동공이 흐릿해졌다. 낮잠 시간을 그르친 앙이는 잠이 와서 울면서도 자지 않으려고 울었다. 낯선 환경, 쪽쪽이의 부재 같은 불편함들을 말 대신 울음으로 표현하느라 온몸으로 애썼다. 땀을 뻘뻘 흘리고 몸을 떨면서 울었다. 제 몸보다 큰 감정을 감당하지 못해 실신한 배우처럼 보였다. 1막의 응원자들은 위로자가 되어 앙이를 달랬다. 앙이의 속마음을 추측하고 울음을 그치게 할 방법을 찾았다. 저마다 새로운 인형을 가지고 오거나, 커튼을 치거나, 침대에 같이 누워 보느라 분주했다.
아무런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누나, 안 되겠다. 그냥 가야겠다. 다음에 또 올게.” 결국 앙이의 아빠는 앙이를 안고 가버렸다. 주인공의 방전으로 우리들의 연극은 중도에 막을 내렸다. 앙이가 떠나고 나와 아이들은 앙이의 낮잠을 위해 깔아놓은 이불 위에 나란히 누웠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첫째 아이가 말했다.
“강이는 왜 잠이 오는데도 안 자고 계속 울었을까? 말을 안 하고 울기만 하니까 힘들었어.”
“아직 말을 못하는 아기니까. 근데 너는 말할 줄 알면서 왜 말로 안 하고 성질만 내?”
“그럼 엄마는 왜 강이한테처럼 나 안 달래 줘?”
울음으로 저를 표현하는 아기의 속마음을 알아내려고 애를 써놓고, 화로 저를 표현하는 사춘기 아이의 속사정은 관망했다. 짐작은커녕 머릿속에 쌓인 데이터와 장면의 캡쳐만으로 판단하고 잔소리를 난사했다. 아이의 무언에는 대답하라는 큰소리로, 세모 눈에는 눈 똑바로 뜨라는 겁박으로, 뾰족한 입에는 예의를 갖추라는 훈계로 대응했다. 인생의 강을 다 건너지도 않은 아이에게 다 큰 어른 취급을 한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포르티시모였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는 앙이는 어린이집에서 하면 안 되는 일을 ‘삐!’ 소리로 표현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장난감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낮잠을 재우려고 할 때 “삐! 삐!” 소리로 저지 신호를 보냈다. 어쩌면 사춘기 아이의 세모 눈과 뾰족한 입은 제 속마음을 담은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제 엄마에게 닿지 않고 벽에 튕겨 돌아온 신호에 아이의 사춘기는 시작된 것일까? 트루먼이 라디오 신호의 오류에 세계를 의심하다 세트장의 끝을 발견하는 것처럼 아이도 그때부터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연 것일까? 말로 변환되지 못한 신호는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배척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앙이가 떠나고 30분쯤 지났을 때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차에 태웠더니 앙이가 바로 잠들었다고. 조금 더 재우고 우리 집으로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앙이가 다시 무대에 오르기 위해 잠으로 충전할 때 우리도 가만히 누운 채로 힘을 보충했다. 앙이가 돌아와 다시 장난감들을 조몰락거리며 세계를 탐구할 때 우리 모두는 다시 혼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강이, 다시 기분이 좋아졌어? 또 놀아볼까?” 에너지가 차오른 앙이는 말랑한 손으로 내가 아끼는 회전목마 오르골을 연신 조몰락거렸다. 그러다 앙이의 무른 손이 오르골을 그만 놓쳐버렸고 회전목마 지붕에서 몇 조각의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나는 앙이가 다치지 않게 바로 파편들을 치워버렸다. 그리고는 망설임없이 다른 오르골을 내어주었다. 마치 다음 장면의 세트로 무대를 체인지하듯. 아끼는 오르골이 망가진 것에 대해 나는 애초부터 화를 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앙이는 우리 집을 떠났다. 앙이가 남긴 흔적—거실 바닥의 손가락 자국과 식탁 위에 흩뿌려진 밥풀—을 지우는데 둘째 아이가 와서 말했다.
“엄마 오르골 어떡해? 엄마가 아끼는 거잖아. 우리가 부쉈으면 화냈을 거면서 왜 화 안 내?”
이 아이들을 연극의 주인공에서 급작스럽게 주변인으로 만든 것은 부조리한 나일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언제까지고 아기인 상태로 강을 건너지 않을 수는 없다.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 세계에 대한 의구심이 한 인간을 인생의 강을 건너게, 즉 다른 세계로 진입하게 한다. 다만 부조리한 신호의 오류로 의구심을 피워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를 일으킬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올린 돛에 순풍을 불어 주는 조력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제 인생의 강을 건너는 온전한 주인공이 되도록.
우리는 모두 우리 삶의 연기자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우리는 한때는 주인공인 트루먼이었다가 또 한때는 주변인인 메릴이 된다. 할 수 있는 것은 대본의 지시문을 숙지하고 그 순간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일 뿐이다. 제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다 다른 세계의 문을 찾아낸 트루먼처럼. 트루먼이 다른 세계의 문을 열기 위해 바다를 건널 때도 한껏 웃는 낯으로 친절하게 코코아를 PPL 하는 메릴처럼. 앙이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며 한 편의 연극을 무대 위로 올렸던 것처럼 우리는 인생에 장막이 내릴 때까지 그때그때의 역할에 혼신의 연기를 펼치는 수밖에 없다. 그때의 연기는 더할 나위 없이 핍진하다.
“엄마, 아기는 귀여운데 계속 같이 있는 건 뭔가 힘들어.”
“너희는 안 귀여운데 힘까지 들어.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인생의 강을 건너기 위한 혼신의 연기는 때로 우리를 힘에 부치게 한다. 그러나 먼저 건너간 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위안이 되지 않을까. 먼저 건너간 이와 어느 날 어느 때 손을 잡고 같이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요즘 옛날의 엄마와 지금의 나와 옛날의 나와 지금의 내 아이와 동시에 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강 위를 혼자 부유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무대 뒤에서도 같이 있자는 것. 서로의 지시문을 해석하며 다음 연극을 함께 연습하자는 것. 다만 신호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독백과 방백 대신 대사로 장면을 처리하자는 것.
‘제발 마음을 말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