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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카 Oct 15. 2024

자유남편 11화 _ 두려움은 피할수록 더 커진다

24.8.5(월) 18일차

주말의 피곤함으로 일찍 퇴근하고 싶었다.

잠을 푹 자야 하는데 잠이 부족하다.

어제는 이상하게 늦게 자고 싶은 생각이 조금 늦게 잤더니 피로가 누적이 된듯하다.

무거웠던 마음을 달래려다 피곤함으로 가득 채웠나 보다.

늘 정신없는 월요일은 피곤함과 함께 정신없이 지나갔다.

이제는 자유로움은 잊은채 어느새 반복되는 일상에 녹아져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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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6(화) 19일차

마음의 여유는 마음에서

나의 근황을 인스타로 보면서 종종 연락하던 채영 아빠가 급 만나자고 했다.

첫째 친구네 가족인데도 코드가 잘 맞아 같이 캠핑도 자주 다녔는데.

와이프와 애들이 미국으로 섬머스쿨을 간 것도, 내가 자유 남편이라는 것도 부러워하며

그래도 자유가 있을 때 둘이서 만나서 소주 한잔하자고 했다.

퇴근 후 양재에서 만났다. 메뉴는 양꼬치로 정하고 채영 아빠가 먼저 장소에 도착해있었다.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참 하던 중 채영 엄마에게 연락이 왔는지 다급한 표정을 하며 통화를 했다.

갑자기 야근을 하게 돼서 1차에서 마치고 집에 가야 한다고 했다.  

맞벌이라 둘이 열심히 고군분투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걸 알기 때문에 얼른 마무리하고 가라고 하고

1차를 마무리한 뒤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해가 떠있어 날이 훤했다.

그들도 충분히 그것을 하고 누릴 수 있음에도 타인의 삶을 동경하는 걸 보니 그게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쥐고 있음에도 타인의 여유를 부러워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만이 아닌 나의 모습 또한 같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덕분에 집으로 바로 갈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

하루의 일정이 새벽 달리기로 시작하는데 근래에 거리와 시간이 늘어서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쉬고만 싶었다.


24.8.8(목) 21일차

치통

하루의 루틴은 자유남편이 되었음에도 똑같다.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출근 준비를 하고 일과를 마치고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와 가사노동과 육아를 하는 대신 독서와 아이패드로 글쓰기였다.

단조롭지만 하루하루 정신없이 빠르게 지나가고 나의 자유도 일주일이 채 남지 않았다.

금요일 휴무일을 껴서 그간 못 내려간 부모님댁과 처갓집에 가기로 결정했다.

퇴근하고 짐을 얼른 챙기고 매주 목요일 져녁에 하는 달리기 수업을 들었다.


한 달 전부터 어금니가 시큰거려 치과에 가니 치아가 썩었을 수 있으나 잇몸이 가라앉아 그 사이에 염증이 생겨서 시린 것일지도 모르니 우선은 잇몸 치주염에 좋은 치약을 2~3주 써보고 오라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시린 것은 사라졌는데 계속 욱신거리고 심지어 음식을 씹을 때도 시큰거렸다.  

그 통증은 달리기를 하고 나면 발 내디딜 때마다 진동이 진통 지점에 영향을 줘서 그런지 더 시렸다.

달리기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내내 어금니가 너무 욱신거려서 타이레놀을 두 알이나 먹었다.

어금니는 아마 썩어서 그런 거 같은데... 치료가 두려웠고 그 치료의 정도도 가늠할 수 없어서 더 무서웠다. 다시 때우기엔 내 생각엔 부위가 커 보였고 그러면 임플란트까지 고려해 볼 만한 상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4.8.9(금) 22일차

반 생활 체육인의 삶

시골집에서도 어김없이 새벽에 달리기를 했다.

10월에 있을 춘천 마라톤을 접수하고 거의 매일 같이 아침 달리기를 하고 있다.

건강 달리기로 시작된 나의 달리기는 이제 생활체육인과 같은 삶이 되었다.

고향에 내려왔다면 어김없이 친구들을 만나 밤에 한잔하자 불러내서 밤늦은 시간까지 놀았을 텐데

이제는 고향이든 서울이든 음주는 다음날 훈련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최대한 멀리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시작했는데 달리기 때문에 생활 방식이 많이 바뀐 게 내 스스로도 너무 신기하다.

오늘의 달리기 미션은 90분 달리기였다. 김제시민운동장 트랙을 가보기로 결심하고 새벽 6시에 맞춰 갔다. 사람도 없고 조용하니 좋았다. 다행히 날이 흐려서 너무 덥지는 않았다.

지루하고 힘들었지만 어느 새부터 이런 지루함과 고통스러움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정신없는 삶 속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와 대면하거나 대화할 일이 없는데 그런 달리기의 시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그 생각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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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친구

집에 와서 낮잠  한숨 자야지 했는데 인스타에 올린 달리기 포스팅을 보고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김제에서 퓨전요리 음식점을 하는 현정이가 장사 시작하기 전에 시간이 된다고 해서 커피 두 잔을 사서 가게에 갔다.

늘 부지런히 사는 내가 대단하다며 치켜세워주는 친구 현정이.

세월이 흘러 너무 철들고 어른스러워진 게 조금은 애잔한지 나보고 그만 철들라고 했다.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많은 변곡점들이 있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쩌면 과거의 나의 친구들에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내성적이지만 엄청난 말썽 꾸리기였다. 그런 나의 엉뚱함에 엄마 아빠는 당혹스러운  일을 여러 번 겪으셨다.

그런 수줍음이 많지만 까불어대는 모습은 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많이 바뀌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또 바뀌게 되었다.



엄마와 장모님

현정이네 가게에서 오랜만에 긴 수다를 떨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빠는 폐렴 검진 겸 약을 타러 예수병원에 가셔서 엄마랑 점심 먹으려고 나왔다.

냉면이나 먹을까 했는데 육회비빔밥을 먹자고 해서 김제 스타벅스 옆에 한우촌에 가서 먹었다.

음식이 너무 짜고 맛이 별로여서 엄마가 불만을 토로했다.

엄마의 병환으로 살이 많이 빠지시고 근육이 줄어 무릎 관절도 안 좋아 야위고 걸음이 불편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고 걱정이 되었다.

건강이라는 자유를 위해 꾸준히 운동하시기를 권해드리는데 가까이 살면 자주 챙겨드릴 텐데라는 생각에 더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와서 짐을 챙겨 전주 처가로 넘어갔다. 처갓집에 가는데도 엄마는 짐을 트렁크 한가득 챙겨주셨다.

처가 올라가는 길에 어금니가 시려서 치과를 가려고 했는데 치과 예약이 다 차서 대기해야 한다고 하고

치통도 오락가락해서 그냥 참기로 했다.

처가로 가서 잠시 한숨 자고 장모님과 혁신도시 고기 먹으러 갔다가 기지재 둘레길을 한 바퀴 돌았다.

늘 제철 음식과 몸에 좋은 것을 챙겨드시고 운동도 꾸준히 하시는 장모님은 활력이 항상 넘치신다.

늘 긍정적이고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모습은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으셔서 장모님과의 대화는 늘 즐겁고 많은 깨우침을 얻게 된다.


24.8.10(토) 23일차

상상의 고통 현실의 치통

새벽 5시 기상해서 김제 집으로 갔다. 새벽에 고추를 딴다고 해서 왔더니 엄마 아빠는 이미 일어나 계셨다.

집 옆 텃밭으로 고추밭을 옮겨서 이전보다 규모가 작아지긴 했지만 고추가 많이 열려서 생각보다 많이 땄고 시간도 꽤 걸렸다. 세척해서 건조기 넣을 준비까지 하려고 했는데 이가 아파서 치과를 가야겠다고 먼저 올라왔다. 두 분이 하시려면 힘드실 텐데 마무리를 다 하지 못한 게 마음이 걸렸지만 미국 여행을 앞두고 치아가 아픈 게 두렵고 걱정이 되었다.

육안상으로는 충치는 없고 엑스레이도 잇몸이나 충치로 보이는 건 없다고 했다. 크라운으로 때운 곳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수도 있는데 우선은 잇몸 치료를 해보고 경과를 봐야 한다고 했다.

잇몸치료만 받고 처가로 와서 한숨 잤다.

장모님은 미용/이발 선교 교육받고 오시고 점심 무렵이 되어서 오셔서 함께 혁신에 있는 육회 비빔밥집에 갔다.

이가 시큰거려서 씹는데 조금 불편함이 느껴졌다.

치아가 썩었을까 하는 걱정에 치과 의사의 잇몸병일 수 있다는 소견에 안심을 했는데 여전히 통증이 지속되니 불안한 마음이 계속되었다.

아무래도 치아가 썩은 거 같다. 때운 금니 보철을 떼어내고 제대로 치료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면서 걱정을 하면서 두려움을 회피하려 했지만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는 걸 예감했다.

밥을 먹고 와서 집을 꾸리고 서울 집으로 향했다.

이상하게 혼자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라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짐 풀고 나서 미국에 가져갈 짐의 양을 보니 캐리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급하게 당근을 했다. 28인치 캐리어였다.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하니 새로 살 건데 왜 샀냐며 핀잔을 주었다. 애들한테 시달려 힘든 기색이 있어 이해는 됐지만

미국에 가져갈 짐의 양이 부담스러운 내 입장은 이해를 못 해주니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

자유 남편임에도 멀리 미국에서 부리는 짜증이 원격으로 고스란히 전달되어 나도 짜증이 나면서도 차라리 함께 있으면 애들이라도 케어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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