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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새우타령

by 최연수

해를 등지고도

길을 잃지 않았노라.

길잡이 그림자를

놓치지 않고 따라왔으니.

터덜터덜 밤길 걸으면서도

외롭지 않았노라.

뒷바라지 그림자가

찰떡같이 따라왔으니.

물그림자 어른거려도

놀라지 않았노라.

빛나는 두 눈 꼭 다문 입

찌그러지지 않았으니.

구름이 심술부려도

누긋하게 참았노라.

바람이 덤벼들어도

끄떡없이 버티었으니.





고대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Plinius)가 쓴 博物誌(박물지)의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 出征(출정)한 애인의 모습 오래 간직하고자,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을 그림으로서 미술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곧 그림자를 본뜬 행위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18c 영국 명암법의 대가 조지프 라이트(Wright)는 빛과 어두움의 효과를 탐구하는 도구로 그림자를 활용, 빛과 그림자가 만드는 효과를 중시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릴 때에 明暗(명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빛과 그림자는 나와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나와 쌍둥이거나 제2의 나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아장아장 걸음마를 배울 때도 나를 뒤따라 다니면서 배웠으며, 달리기할 때도 나보다 앞서서 먼저 골라인을 통과하였다. 구름이 심술부리며 가려도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어두울 때에도 달 그림자는 따라다니며, 잠들 때에는 함께 잔다.


혼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해를 등지며 살아갈 때도, 누군가 내 앞길을 인도했기에 방황하지 않았다. 모진 역경 속에서 비틀비틀 혼자 걸을 때에도, 누군가 나를 뒷바라지하며 함께 걸어왔기에 외롭고 슬프지 않았다. 그 실체가 누군지 깨닫지는 못했지만 분명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한 때 나의 正體性(정체성)에 懷疑(회의)를 하며, 自嘲(자조)․自賤(자천)․自虐(자학)의 늪에 빠지기도 했다. 못난 내 얼굴이 물 그림자로 어른거릴 때 火傷(화상)처럼 어그러지고 찌그러진 모습일 거라고 상상하며 조마조마 하였다. 그래도 두 눈이 빛나고 있고, 입이 굳게 다물어져 있음을 보며 安堵(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 앞길을 인도했던 그림자, 나를 뒷바라지했던 그 그림자! ‘그래, 그림자는 결코 虛像(허상) 아니구나!’


實體(실체)가 아니라고 거들떠보지 않았던 그림자가 하나님일 수 있고, 하나

님께서 너는 내 것이라 지명하여 불러주신(사43:1) 아들 곧 나 자신일 수 있다. 그림을 그릴 때면, 삼복 더위의 나무 그늘처럼 그림자를 아주 소중하게 여긴다. 소년 시절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할 때도,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 않는다는 옛 어른들의 말을 떠올리지 않았나? ‘해를 바라보라. 해를 쳐다보라. 그림자가 안 생길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자는 나와 함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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