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림자 발자국

새우타령

by 최연수

공룡은 잘 나서

만만년 까딱없는

바위 위에다.

갈매기는

파도치면 지워지는

모래톱 위에다.

소금쟁이는

바람 일면 흔들리는

연못 위에다.


강아지는

해 뜨면 녹아버린

눈밭 위에다.


저렇게도

남기고 싶은

발자국 발자국 발자국.


해는 서산에 댕그랗게 걸리고

땅거미가 잠자리를 펴는데

그림자는 언제 어디다

제 그림자를 남기랴.


<회고록 1에서 전재>




수 만년 전 中生代(중생대)의 주라기․白堊紀(백악기), 지구상에 번성했던 巨軀(거구)의 恐龍(공룡)은, 화석을 통해서만 그 형체를 짐작할 수 있다.특히 바위에 남아있는 그 커다란 발자국은 지금까지도 생생해서, 공룡 연구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 몸집이 얼마나 육중했으면 그토록 뚜렷한 발자국을 남겼을까?

바닷가 모래톱에는 갈매기들이 발자국을 남긴다. 그러나 파도가 밀려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도 갈매기는 또 발자국을 남기고자 한다.

연못에서 물 위를 걸어 다니는 소금쟁이도 아마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그러나 바람이 일어 물결이 흔들리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그래도 발자국을 남기고자 했을 것이다.

눈이 쌓이면 강아지들이 신난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또한 발자국을 남긴다. 하지만 눈이 계속 내리면 덮이고, 눈이 녹으면 흔적 없이 사라진다. 그래도 발자국을 남기고 싶을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한다. 聖人(성인) 君子(군자)야 그 一擧手一投足(일거수일투족)이 후세에 교훈이 되고, 英雄(영웅) 豪傑(호걸)의 방귀 한 방도 대단한 일일 수 있다. 그런데 凡人(범인)인 내가 무슨 足跡(족적)이 있다고 이름을 남기랴. 80 평생을 살아오면서 凡俗(범속)하게 산다는 것도 특별하게 사는 것 못지않게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다만 記錄(기록) 하는 일에 남다른 습관이 있어, 평생 동안 일기를 비롯해서 備忘錄(비망록)을 많이 썼다. 이것을 모아 회고록 등 여러 권의책을 만들었다. 이것만이 곧 나의 발자국인데, 자서전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그림자의 발자국’이라 이름 지었다. 실체도 아닌 그림자가 무슨 발자국이 있으랴고.

갈매기․소금쟁이․강아지들이 남긴 발자국은 흔적도 없고, 공룡의 발자국만이 오랜 세월 남아있다. 해는 서산에 댕그랗게 걸리고, 땅거미가 잠자리를 펴는데, 그림자가 언제 어디다가 그림자를 남기랴.

이 시는 회고록 1에 실은 것인데 30여 년만에 다시 이곳에 옮겨 실었다.

keyword
이전 15화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