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철부지 시절, 동네 마부집 아이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따돌리고, 코를 움켜쥐며 종종걸음으로 그 집 앞을 지나갔다. 말에게 채찍질하고, 구두 밑바닥에 징을 박듯이 말 발굽에 대못을 박는 아저씨를 몹쓸 사람으로 알았다. 팔뚝만한 시커먼 거시기를 디룽거리는 모습, 짓궂게도 낭기마(郎騎馬)의 ☓을 건드리는 바람에 사모관대한 신랑이 낙마했던 사건....
옛일을 생각하다가 지하철 4호선 경마공원역을 지나칠뻔 했다. 도박장이라면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겠다는 것이 좌우명이었는데...과연 북새통이다. 입구에는 커다란 청동마상이 경마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족공원 쪽으로 가는 길은 무료 꽃마차가 왕자와 공주를 태우고 오가며, 경마장 쪽으로 가는 길은 가만히 서있어도 인파에 휩쓸렸다. ‘꿈으로’라는 전용통로인데, 아닌게아니라 모두들 대박을 꿈꾸며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 별세계다. 상큼한 공기가 볼에 뽀뽀를 해주고, 깨끗하고 정갈한 광장이 소매를 잡아 끌어준다.
폭포광장 앞의 예시장에는 12마리의 말이 선보이며 워밍업 하는데, 이를 예의 주시하며 체크하는 모습이 진지하다. 모두들 행운의 마권을 사들었지만, 이방인인 나는 마사회 본관 헤피 빌 2층으로 올라갔다. 발 아래 펼쳐진 경마장 끝이 아스랗고, 경주장 한가운데 섬이 되어있는 초록 공원이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준 느낌이다.
11시. 1200m 경주. 많은 사람들이 응원을 하는데, 10번 비스터 빌리가 1위로 골인하자, 옆 사람이 춤을 추며 환호다. 눈 깜짝할 새다. 이어서 1300m 경주. 주마가편이라 했지. 기수가 채찍질로 다그치는 혼전 속에서, 몇 차례 순위가 바뀌면서 아닌게아니라 질풍노도와 같은 박진감이었다. 6번 매직칸이 1위인데, 코 차인지 머리 차인지, 내 눈으로는 가름할 수 없었다. 이렇게 모두 11회의 경주를 갖는다는데, 그만 자리를 떠나 마사박물관으로.
우리 민족의 기마 문화를 위해 설립했다는데, 규모는 크지 않으나 짜임새 있게 잘 꾸며져 있었다. 어렸을 적에 늘 궁금했던 ‘장제’에 관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발굽은 젤라틴으로 이루어진 발톱의 뾰족한 끝부분이 변형된 것인데, 발굽이 자라므로 월 2회 편자를 제거하여 새 편자를 부착해야 한다고. 그래야 잘 달릴 수 있으며, 완충 작용을 한다는 것.
경주마의 질주 본능은 순발력․근력․폐활량 등 육체적 능력과, 승부 근성 그리고 기수와의 친화력 등 정신적 부분이 합쳐져야 한다고. 그런데 이 질주 본능의 30% 이상은 유전적이라는 게 전문가의 견해다. 따라서 족보가 중요하겠다. 인공수정은 국제경마연맹 규정상 금지되어, 혈통이 좋은 말만 선별하여 자연교배를 통해서만 번식한단다. 우리나라의 명마는 거의 미국에서 수입한 디디미의 자손들인데, 그 후 컨셉트윈과 피어슬리의 자손들도 유명하다는 것. 그런데 이 3대 명가의 가계를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다알리 아리비안인데, 세계 명마의 95%가 그 후손이라고 한다.
‘이클리스 이전과 이후’라는 말이 있듯이, 그가 은퇴한 후 씨수말로만 활동한다고 한다. 씨수말과 함께 번식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수말에 시정마(始情馬)가 있다. 곧 암말을 흥분시킨 후 다른 제왕마(帝王馬)인 씨수말에게 신방을 빼앗긴 채 강제로 끌려 나간다니, 열정에 들떴다가 헛발짓만 한 셈이다. 그씨수말은 연 100 마리 정도를 수태시킨다니, 대단한 정력이다.
계속되는 경마로 인한 환성과 탄성의 불협화음을 등지고 가족공원으로. 솔밭정원에서 솔냄새를 맡으며 간식. 경마장과는 별세계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가족들이 꽤 많았으나, 워낙 넓어 오히려 한산한 느낌. 포니랜드에서는 제주 조랑말보다 작은 형형색색의 봉제 장난감 같은 말들을 가까이 구경할 수 있었다. 두 곳의 어린이 승마장은 무료로 하루 한 번 5분 정도 직접 말을 타보는 체험장인데, 아이들은 의젓한 기수요 부모들은 사진사들. 어린이 놀이터도 규모가 크고 갖가지 놀이기구가 갖추어져 신나게 놀 수 있으며, 자전거․인라인스케이트도 공짜로 빌려 맘껏 놀 수 있었다. 어린 아기들이 놀 수 있는 어린이 휴게실이 3 개소나 마련되어 있고, 돗자리․유모차․휠체어 등을 역시 무료로 빌릴 수 있다.
말잠자리가 날아다니는 야생화 정원에서 도랑물이 흘러내린다. 여울돌들은 달걀처럼 반들거리고 매끈매끈하여 맘껏 물놀이 할 수 있다. 또한 비단 보료처럼 깨끗하고 고슬고슬하게 깔린 넓은 잔디밭에서도 싫건 뒹굴며 뛰놀 수 있다. 낙원이 따로 있으랴. 마사골의 팔각정과 여러 곳의 원두막, 그리고 여기저기 놓여있는 벤치와 텐트....어른들을 위한 안락한 쉼터인데, 이곳에도 대형 모니터를 통해 경마를 즐기고 있었다. 마권은 사지 않았는데도 경마에 관해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경주마는 출마를 위해 3년 이상 훈련을 가져야 하고, 출마 하면 5〜20Kg의 체중이 줄며, 따라서 한 달 이상 쉬어야 한다는 것. 어두운 곳에 들어가 휘파람을 불면 겁을 먹고 소변을 하는데, 이 소변으로 약물 검사를 한다는 것....
전통 혼례장은 예약만 하면, 혼례식을 무료로 치르어 준다니,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단풍빛 사랑이라면’ 시가 발길을 멈추게 하는군. 어린이 계절 체험장과 장미원을 끝으로 둘러보고 해가 설핏하여 공원을 나왔다. 길거리 술집에는, 돈을 번 사람은 기뻐서 한 잔, 잃은 사람은 속을 삭히느라고 거나하게 한 잔.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말들은 지금쯤 융숭한 저녁 식사 대접을 받고 있겠지. 천고마비의 계절 말들아, 토실토실 살찌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