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카나리아

종이새가 깐 알

by 최연수 Jan 29. 2025

 재호는 기꾸장이 한 송이 국화처럼 예뻐 보였다. 기꾸고(菊子)를 기꾸장이라고 불렀는데, 일본말 기꾸는 우리 말로 국화인 것이다. 풋감 주우러 갔다가 비록 거지, 도둑놈이라는 욕은 먹었어도, 인형같이 예쁜 기꾸장과 사귀고 싶었다. 기꾸장네 집은 겉보기에도 참 멋있었다. 바깥채는 병원인데, 담쟁이덩굴이 기어올라가 바깥벽을 시원스럽게 덮었고, 붉은단풍과 호랑아까시나무와 잘 다듬어진 향나무 사철나무들이 현관 앞에 나란히 줄서있었다. 회양나무와 측백나무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안채인데, 안채는 정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은 차라리 공원이라고 불러야 어울릴 것 같았다. 

 사철 다투어 피어나는 갖가지 꽃들이며, 철 따라 고운 옷을 갈아입는 나무들과 괴상한 모양의 바위들과, 그리고 잉어가 노니는 작은 연못이 한데 어우러져, 손바닥만한 뜰도 없는 재호의 마음을 늘 사로잡았다. 그리고 대문에 바짝 귀를 대고 있으면 집 안 어디선가에서 고운 새 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새일까?

 어느 날 재호는 집 앞을 지나가는 기꾸장을 불렀다.  

 “ 기꾸장! ”

 숫기가 없다고 걱정을 들어오던 재호에게 이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을까?  기꾸장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재호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었다.

 “ 이것 선물이여. ”

하며 그림 한 장을 내밀었다. 새장 옆에서 국화 꽃다발을 안고 방긋 웃는 기꾸장의 모습을 상상해서 그린 것이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버리면 어떻게 하나 불안해하는데 기꾸장은 뜻밖에도

 “ 이게 뭔데? ”

하며 받아들고 관심을 보였다.

 “ 기꾸장이여. 이쁘지? ”

 그러나 기꾸장은 얼굴을 붉히며 이내 집안으로 뛰어들어가 버렸다. 꿩 떨어진 메처럼 어이없어진 재호는 기꾸장이 야속해 보였다.

  재호는 그 날 마에다 반장 댁에 갔다. 어머니는 살림에 쪼들린 나머지 그 집 허드렛일과 식료품 가게 일을 도와주면서, 먹을 것이랑 입을 것이랑 얻어 왔다. 

 마에다는 외동딸을 내지로 시집보내고 내외분 둘이서만 쓸쓸하게 살고 있었는데, 병풍처럼 어긋난 누런 이를 내보이며, 늘 웃음을 머금은 채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제법 조선말을 섞어 쓰기도 하면서, 조선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는데, 재호네와 깊이 사귄 후로는 재호를 귀여워했다.

 “ 마에다상, 왜 기꾸장은 조선 사람을 싫어한다요? ”

 “ 싫어하긴.....”

 “ 그런디, 날 싫어하는디요? ”

 “ 그럴 리가....내선일첸데....”

 “ 말대꾸도 안 하고요....” 

 “ 어머! 재호가 기꾸장을 좋아하나 보지? ”

 “ ............”

 재호는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자 마에다 할머니는

 “ 내가 잘 사귀도록 해줄까? ”

하고 한 눈을 깜박하며 윙크를 했다. 

 며칠 후, 재호는 마에다 집에서 정말 기꾸장을 만났다. 기꾸장은 다꾸앙(짠무)을 사러 온 것이다. 어머니가 떠주었다는 예쁜 스웨타를 입고 있었는데, 마에다는 기꾸장 어머니의 뜨개질 솜씨를 입술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재호의 눈에도 참으로 근사했다. 괜히 가슴이 울렁거린 재호는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눈치 빠른 마에다가 말머리를 꺼내었다.

 “ 재호가 널 좋아하는 걸 모르지? ”

 “ 어머! 재호는 조선 사람인데요....”

 기꾸장의 눈길이 재호를 훑어 내려가자 재호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 내선일첸데, 앞으론 사이좋게 지내렴. ”

 “ ..............” 

 재호는 용기가 생겼다. 

 “ 내가 준 기림 으츠구 됐어? ”

 “ 음, 내 책상 서랍에....” 

 아! 재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책상은 바로 아버지가 정성을 다해서 만들어 판 그 오동나무 책상이 아니겠는가?  

 “ 그 책상 우리 아부지가 만들었는디....”

재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 너 그림 잘 그리던데? 또 그림 한 장 그려 줄래? ”

 재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재호가 미쳐 대답할 겨를 도 없이, 기꾸장은 자기 집 정원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 그래! ”

 재호는 뜻밖의 부탁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그 꿈 동산을 그릴 수 있다니, 이 행운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 길로 재호는 기꾸장네에 들어갔다. 나지막한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있는 정성을 다하여 그림을 그렸다. 기꾸장이 꺼내 준 큰 도화지와 크레파스와 그림물감이 얼마나 좋은지 그림이 저절로 그려진 것 같았다. 재호의 눈에도 나무와 꽃들과 심지어 바위까지도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뜨개질을 하다말고, 재호의 손놀림을 눈여겨보고 있던 기꾸장의 어머니가

 “ 그림 솜씨가 썩 좋구나? ”

하고 대단한 칭찬을 하였다. 재호의 어깨가 저절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1학년 때 그림 솜씨를 칭찬해 주었던 노무라 선생님과, 환장이가 되려 하느냐고 못마땅해하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 호루루루르 호루루루르...”

 재호는 눈길을 돌렸다. 새장에서는 노란 새 한 쌍이 고운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카나리아라고 했다. 아프리카의 카나리아섬이 원산지라 그 이름이 붙었노라고 했다. 재호는 메테르팅크의 동화극 ‘파랑새’를 생각하면서, 틸틸과 미틸이 찾아다니던 그 파랑새일 것이라고 상상해왔는데, 전혀 딴판이었다. 

 “ 기꾸장, 다시 니 기림 그려 줄게. 전에 기린 새는 포랑새였는디, 저건 노랑새 아니여? ” 

 재호는 기꾸장 어머니로부터 과자와 과일을 대접받았다.  기꾸장 어머니는, 코를 훌쩍이지 말고 손수건을 갖고 다니라는 것이며, 가래침을 뱉지 말라는 것이며, 손발톱을 짧게 깎으라는 것이며, 욕지거리를 하지 말라는 것이며....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갖추어야 할 몸가짐이 많다는 말을 해주었다. 재호는 자기의 나쁜 습관을 족집게로 집어내는 것 같아, 참 부끄러웠다. 고개만 끄덕거렸다.

 "호루루루르 호루루루르..”

 마에다나 기꾸장네는 참 맛있는 것을 배부르게 먹고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쌀. 보리 공출을 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늘 배가 고팠다. 꽁보리밥이나 조밥으로 하루 두 끼니만 먹어도 다행이고, 고구마로 점심을 때운 것도 형편이 나은 집이었다. 쑥 버무러기, 도토리 묵......상수리 죽을 쑤어 먹다가 마침내는 솔잎을 맷돌에 갈아 그 즙을 마시기도 했는데, 재호는 콩깻묵 먹고 식중독 걸렸을 때가 차라리 나았지, 정말 솔잎 즙은 역겨워 구역질이 났다. 

“ 엄니, 우리도 부자 돼 갖고 기꾸장네 같이 살제 잉.”

“ 뱁새가 황새걸음 걸으믄 가랭이가 찢어지는 법이여.”

“ 아부지만 돈 많이 벌어 오믄 부자 안 돼?”

“ 죽었다 깨어나도 일본 사람 같이는 못 살어.”

“.............”

 왜 조선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 같이 못 사는 것일까? 재호는 종

이 학을 또 접었다. 접을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돈을 많이 벌어 오면 기꾸장네와 같은 멋진 집도 짓고 정원도 만들며, 귤이랑 포도 같은 과일을 싫건 먹을 것이다. 스웨타도 입고 운동화도 신을 것이다.  그리고 카나리아 같은 예쁜 새도 기를 것이다.

  ‘소년들이여, 대망을 품어라!’고 선생님들은 입버릇처럼 이야기했고, 다른 아이들은 장군, 과학자, 예술가 등 큰 꿈의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날았지만, 재호에게는 아직 그런 꿈을 가슴에 품어본 적이 없었다. 하늘과 바다를 맘껏 날아다니던 마량리의 그 갈매기와 황새가 귀엽기만 했을 뿐, 그리고 그 새를 잡아다가 새장에 넣고 기르고만 싶을 뿐, 새장 밖 세상이 얼마나 넓고 아름다운 것인지, 새처럼 하늘을 마음껏 날고싶다는 생각은 해본 일이 아직 없었다. 



1) 내지(內地)...일본의 본토     

이전 05화 독수리 학급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