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새가 깐 알
돌아오는 길에서 영식이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다. 장난 삼아 피운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연기를 내뿜는 품이 한 두 번 피운 솜씨는 아니었다. 꽁초조차 남김없이 다 피운 영식이는 가래침을 탁 뱉더니, 또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은 마치 거미 꽁무니에서 거미줄 나오듯 했다. 왕방울과 자라와는 아주 딴판인 이야기였다.
“느그들, 공산주의가 먼지 잘 모르지야?”
“.................”
“참 좋은 거여. 부자, 가난한 사람 구별 없이 똑같이 평등하게 살자는 거여.”
“............”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머슴 부려묵고, 소작 주고 사는 지주 놈들 논밭 몽땅 뺏어다가, 농민들한테 그저 나눠주자는 거여.”
농사를 짓지 않은 재호는 실감이 나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소작을 지어먹은 길남이는 귀를 쫑긋하며 기울이는 것이었다.
“공산주의는 노동자 농민들이 쥔이 되어 정치를 하자는 거여. 그래서 공산주의 나라 쏘련은 세계에서 젤 잘 사는 나라여.”
“공산주의 나라는 쏘련 뿐이 없어?”
“아니. 아조 많지야. 우리 조선도 그런 공산주의 나라가 돼야 잘 사는 거여. 쏘련이 도와주고 있거든.”
“민주주의가 더 좋다고 하던디?”
“백성들이 쥔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인디, 쏘련 공산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란 말이여”
“미국이 민주주의라믄서......”
영식이는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쳐보이며,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여. 돈 있는 맻맻 자본가들이 쥔이 돼갖고, 백성들을 노예만치로 부려먹는 거여. 노동자 농민 들 피를 뽈아갖고, 살이 찐 자본가 놈들이......”
“...........”
“ 민주주의는 다수결로 하는 정친디, 느그들 생각해봐. 노동자 농민이 다수여, 자본가 지주가 다수여? ”
재호는 농사 짓는 농민이 논밭을 가져야 하고, 농산물은 땀 흘리며 일하는 농민들의 몫이어야 한다는 영식이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생각을 했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서도 힘든 일을 하는 많은 노동자들의 몫이 마땅히 많아야 한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영식이는 그리하여 공산주의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을 한다는 것을 힘주어 말했다.
영식이의 입에서 쉴새 없이 쏟아 부어지는 말을 재호는 모조리 알아들었다 할 수는 없었으나, 한 마디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이 아귀가 척척 들어맞은 게 모두가 그럴 듯 했다. 영식이는 왕방울과 자라 이야기보다는, 공산주의 이야기에 더 무게를 싣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말끝마다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는 것이나, 미쳐 깨닫지 못하는 것은 되풀이 해주는 품이 수업 시간의 선생님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온 재호는 밥상머리에서 말을 꺼내었다.
“아부지, 공산주의가 좋다는디요?”
“어느 눔이 그러던?”
“영식이가 그런디라우, 공산주의는 부자 가난한 사람 없이 평등하 게 살자는 거란디요.”
“부자들 재산 가난한 사람한테 나눠준다고? 샛빨간 거짓말이여. 공산주의는 개인 재산을 인정 안혀. 논밭, 집, 공장 강제로 죄다 뺏어다가 나라 것으로 하는 기여. 아니 공산당 것으로 하는 기여. ”
“그러믄 농사는 누가 짓고, 공장은 누가 한디요?”
“농사 짓고 공장 일해서 쎄 빶게 일해도, 즈그 것 안 돼. 몽땅 나라에다 바치는 기여.”
“그러믄 으츠꾸 산다요?”
“나라에서 쬐금씩 똑같이 배급이나 주지야. 너 왜정 때 안 봤어?”
왜정 때 콩깻묵 배급 타먹고 죽을 뻔했던 일이 생각나 몸이 오싹 했다. 그 때 일본 놈들은 공출해간 쌀밥을 배터지게 먹고, 조선 사람들한테는 곰팡이 난 콩깻묵이나 배급 준다고 투덜대던 영식이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배급이나 주는 공산주의를 지금 그는 왜 좋다고 하는 것일까?
“ 노동자 농민들, 즈그 재산도 안 되는디 누가 부지런히 일하겄냐? 빈둥빈둥 놀라고만 하지야. 그런께 총칼로 독재를 해야지 않겄냐?”
“그란디요 잉. 다수를 차지한 노동자 농민들이 그들 뜻대로 정치를 하는 공산주의가, 진짜 민주주의라 하던디요.”
“말도 안 된 소리여. 민주주의는 자유를 줘야 민주주의인디, 자기 재산도 못 갖게 뺏어가고, 평등하게 살게 한다고 총칼로 독재하믄 독재주의지 민주주의 것냐? 공산주의 하믄 폭력을 쓰고 독재하니께 왜놈들 정치하고 다름없어......”
아버지도 질 수 없어 목청을 높여가며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아버지의 말씀도 앞뒤가 꼭꼭 들어맞고, 이치에 어긋남이 없었다. 재호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꾸리 같이 어지러웠다.
대관절 민주주의는 무엇이며 공산주의는 무엇이기에 이토록 열을 내는 것일까? 과연 미국과 쏘련은 어떤 나라이기에, 남의 나라에 삼팔선을 그어서 두 동강이 내놓고, 이토록 우리 나라를 이간질 하고 있는가?
자유의 종소리의 여운도 사라지기 전에, 온통 나라 안이 벌집 쑤셔놓은 것 같이 이렇게 어지러웠다. 한 쪽에서는 미국이 우리 나라
를 독립시켜 준 은인이라면서,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나라를 세워
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을 우익이라 했다. 다른 한 쪽에서는 쏘련이 우리 나라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쏘련과 같은 공산주의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을 좌익이라 했다. 읍사무소 앞
광장 한 쪽에서는 우익들이 목청을 높여 자기들 주장을 펴는가 하면, 맞은편 차부 쪽에서는 좌익들이 주먹을 휘두르며 그들 주장을 내세웠다. 한 쪽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는가 하면 또 야유가 섞여 나오기도 해서, 어느 때는 두 패로 갈리어 멱살을 붙잡고 몸싸움을 벌였다.
오른쪽 왼쪽 양 날개가 다 온전해야 새들이 제대로 나는 법인데, 마치 원수 같이 왜 왼쪽 날개(좌익)는 오른쪽 날개를 치고, 오른쪽 날개(우익)는 왼쪽 날개를 때리면서 잘 날겠다고 하는 것일까?
1) 공산주의...개인의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의 공유로 하여 빈부의 차를 없애자는 사상
2) 민주주의...국민이 주권을 가지고 국민의 뜻에 따라 국민이 정치를 하자는 사상
3) 자본주의...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 계급이 자유로운 경쟁을 통하여 이익을 얻게 하는 사상
4) 무상몰수 무상분배...값을 주지 않고 몰수해서, 값을 받지 않고 나누어 줌
5) 우익(右翼)...오른쪽 날개, 보수적이고 민족주의 색채를 띤 단체
6) 좌익(左翼)...왼족 날개, 급진적이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색채를 띤 단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