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Story 04화

'미안합니다'의 부재

by 영하

경비아저씨가 새로 오셨다.

인사를 나누고 쓰레기에 관해 물으신다. 복잡한 아파트 구조로 힘이 드신 모양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 동은 앞 동과 우리 동 그리고 상가동까지 쓰레기를 같이 처리해야 해서 양이 많은데다 손이 많이 가는 데 비해 경비 아저씨의 손은 부족했다.

방금 공동 현관을 쓸었다시며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서신 경비 아저씨와 쓰레기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시동을 끄지 않고 옆에 있던 차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양인지 비킬 생각이 없다. 현관 앞에도 쓸어야 하는데 차가 저러고 있네요 하신다. 곧 나갈 모양이지요 하고 대답을 하는데 차가 빼꼼히 열린다. 그러더니 자질구레한 쓰레기를 슬쩍 버린다. 본인 차에 두기에는 그렇고 그렇다고 버리러 가자니 또 귀찮고, 쓰레기봉투를 준비하자니 돈을 들여야 하고 뭐 이유야 많을 것이다. 경비 아저씨가 비를 들고 계시니 부러 한 행동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얌체처럼 그렇게 슬쩍 투척하는 것은 또 아니지 않는가 싶어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했다. 주민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고 주민이 아니라 해도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네 아니면 죄송하다고 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웬걸

“아, 알았어요!”

예상했던 대답이 아니어서, 잘못을 해놓고 너무나 당당하게 그리고 아니꼽다는 투로 큰 목소리를 내는 통에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러는 동안 쓰레기 주워 차 문을 쾅 닫는다. 아이도 뒤에 타고 있던데. 참 이게 지금 무슨 일인 거야?

경비아저씨도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지으신다. 하하 앞에 일하던 아파트에서는 아기 기저귀도 버려요 하시면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시는데 나는 왜 천불이 나는지. 나는 사람이 좋지 않나 보다. 그러고도 한참을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던 사람이 나올 때까지 뻔뻔한 자태를 뽐내면서 그르렁대고 있었다. 차가 무슨 죄냐 싶으면서도 왜 그리 쳐다보게 되던지. 그 뒷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말이다. 아이는 아마도 잘못한 일을 해도, 부끄러운 일을 해도 아, 저렇게 큰소리치고 문 쾅 닫아버리면 되는구나 하고 배웠을 것이다. 산 교육이 된 것이다. 누구에게 탓을 할 것인가. 모두 다 지금의 어른들이 보여준 것들이 저런 것들이니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자랐겠는가 말이다. 그래 놓고는 아이들이 엇나가면 본인들이 보여주었던 모습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거울인 아이들만 잡는다. 누굴 닮았냐느니 대체 왜 그러냐느니. 이런 일들은 이제 주변에서 허다하게 보고 있어서 놀랍지도 않다. 식당에서 떠들고 돌아다녀도 누구 하나 말리는 엄마가 없으며 한마디 했다가는 아이를 옹호하느라 난리가 난다. 그러니 아이들은 그래도 되는 줄 아는 것이다. 아이 하나를 기르려면 온 동네가 동참해야 한다고 했는데 무색하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사과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교육의 하나일 것인데 말이다. 왜 이렇게 갈수록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해지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에는 새로 산 기능성 운동화를 크린***에 맡긴 적이 있다. 어떠한 고지도 받지 못했으며 금액만 말하길래 지급했다. 도착했다고 문자가 와서 갔더니 세척이 덜 되었길래 물었더니 다시 해 준단다. 역시 미안하다는 말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찾으러 갔더니 운동화가 거지가 돼서 돌아왔다. 뒤축이 완전히 주저앉았다. 앞부분은 찌그러졌으면 뒤꿈치 부분은 솜이 다 뭉쳐지면서 없는 부분은 없고 있는 부분은 있고 난리가 아니었다. 이미 신발은 신발이 아니었다. 제 기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신었을 때도 잡아주질 못하는 운동화가 아니라 쓰레기가 돼버렸다. 그때도 ‘여기 왜 이래요?’ 하고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진짜 예민하시네요~.”

역시나 비꼬면서. 미안하다든가, 그것도 아니면 오는 말이 곱게

‘어떡하지요, 최선을 다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요. 죄송한데 저희도 잘한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네요’

일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대답과는 달리

“다른 지점에서 배상책임에 대해 고지 들으셨죠?”

“아뇨, 고지 들은 적 없는데요.”

했더니 열심히 알린다. 요는 배상의 의무가 본인들에게는 없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날을 세워 말을 한다는 것이 힘들어지고 귀찮아진다. ‘내가 좀 참지’ 하고 돌아왔는데 집에 돌아와 어찌 신어 볼까 하고 손을 보는데 참담하다. 겨우 삼 개월 신었는데, 짜증이 났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그것보다도 더 크게 짜증이 난 것은 미안하다는 사과는커녕 비웃음을 들었다는 것이 더 참담했다. 나이 헛먹었구나 싶어 자괴감마저 든다.

이렇듯 지금의 세상은 미안하다는 말에 굉장히 인색해지고 있다. 무엇인가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일까, 아니면 지는 것 같은 묘한 패배감이 드는 것일까. 그래서 먼저 상대를 공격해 쓰러뜨리는 것이 맞는다고 보는 것인가? 그렇게 함으로써 본인이 가질 수 있는 패배감이나 손해를 보는 기분을 지울 수 있는 것일까? 설마 교육이라면 뒤지지 않는 이 나라에서 교육이 덜돼서, 아직 지성인이 적어서 이런 말은 하지 않으리라 본다. 이렇게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타인에게 분한 마음을 심어선 안 된다. 사회가 웃음이 사라지고 분기탱천의 마음만 남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는 화마의 뜨거운 용암으로 휩싸이는 사회가 될 것이다.

한발만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고 서로 미안하다고 손을 내민다면 아무것도 아닌 일을, 지지 않으려 하니 다툼이 되고 급기야 고성이 오가는 싸움이 되고, 나중에는 주먹이 오가는 주먹다짐이 되는 것이다. 결국 ‘미안합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주차장에 쓰레기를 버리신 여자분도 ‘미안합니다’ 했다면 경비 아저씨나 나나 ‘아닙니다, 여기 주세요’ 하면서 들고 있던 쓰레받기를 내밀었을 것이고 훈훈하게 마무리됐을 일이다. 더불어 아이에게도 좋은 모습을 보여줘서 훗날을 기약하기가 아름다웠을 테니 서로 마음이 좋지 않았을까?

두 번째 신발도 그렇다.

‘미안합니다. 어떡하지요, 최선을 다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 봐요. 죄송한데 저희도 잘한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네요’

이렇게 말을 건넸다면 내가 이겼으니 갑질을 한답시고 악을 쓰고 물어내라 성을 내고 했을까? 오히려 그 비웃음에 더 화가 났고 자괴감이 들었다.

자고로 미안하다, 죄송하다 사과하는 사람 앞에선 나갈 주먹도 소리로 마무리 짓게 되고, 소리로 나갈 일도 조용히 해결되는 일들이 많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다. 그러니 항상 한발 물러서서 조금은 손해 보는 듯이 사는 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것이라고.

이 나이가 되도록 살아오면서 늘 깨닫는 것이 있다면 어른들 말씀이나, 옛 선조들 말씀은 틀린 적이 없더라는 것이다. 삶을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째서 더 맞아가는 말씀들이 많은지. 그 맞는 말씀들을 하나하나 내 것으로 만들면서 나이를 먹으니 철이 들어가나 보다. 그래서 명언이라 불리고 속담이라 자리를 잡고 이 세상에 남아 함께 살아가나 보다. 한 번 더 그 어른들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나는 조금은 손해 보는 듯 사는 사람인가 나는 배려를 하면서 사는 사람인가를 고민해본다.

미안하다는 말에 매우 인색해진 지금, 나는 인색하지 않게 잘 쓰고 있는 것인지 되돌아본다.




#일상 # 수필 #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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