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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령 Jun 21. 2024

작은 계획들

낼모레 오십 시즌1

용서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감정적인 뉘우침이 있는  상대가  있어야  용서할 수 있는 내가 존재할  수 있다.


서로의  가해자만 존재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네가 바란다면 용서를 해 주겠다"는  넓은 아량이나, 상대가 "내게 용서를 구하러  올 것이다"라는 기다림 따위가  아닌 상대를 잊고  지내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애썼던 나의 지난날의 수고도,  걱정했던  나의  마음,  언제나 잘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기도와  간절한 마음들도 잊고  지내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거  하나.


지난 시간들이  쌓여 현재의 나를 지켜낸 것이 아니라, 미래를  기다리는  마음이 하루하루  나를 지키며 존재하게 한다.

지금  죽어도 되지만, 얼마 전 새로  산  반짝이는 여름 샌들을 신고 날이 푸르고 맑게 화창한 날 외출  하고 싶다는  작은 마음.

주말에  유명한  떡볶이집이나  만두가게에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거라는  작은  계획들.

6월에  곱게 필 동글동글한  수국들을  보고 싶다는 작은 기다림.

"삶이 의미 없다"는  말도 " 인생 별거  없다"는 말도  내가 세워둔 작은 미래들 속에선, "삶은 간혹 의미가  있고, 인생이  별것은  없지만, 하나도 없는 건 아니"라며 잠시 환하게 웃음 지어 본다.

그런 작은 것들이 지나가는 시간들을  보내다  보면, 내게 용서를 구하는 상대가  앞에 와있거나 혹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너를 기다리는 마음만은 아니라고.

너와 함께한  나의  과거 속에서만 내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고.

매일 아침 손잡이가 큰 컵에 든 커피를 깊게 삼키며 가끔 되뇐다.

일어나자 마시는 꿈속 같은 커피 한 잔의 의미는 과거가 아닌 다가 올 1초, 1분, 5분 , 30분, 1시간을  위한 나만의 노크. 똑똑똑 향이 나는 두드림.

하얀 우유 거품이 따뜻하게 부풀어 오르고 금방 내린 진한 에스프레소와  섞여 고소한 라떼가 된다.

한 모금 두 모금 나의 현재도 조금씩  미래로  흘러간다.

오늘은 병원이  예약되어 있다.

이틀 전  과거에 지켜져야 했던 오늘의  계획은 정형외과  진료였다.

어깨 통증이 없는 미래를  위해 규직적인 치료를 받는 것. 

평범하고 조금씩 위태로운  몸을  돌보고 작은 기쁨들을 찾으며 살아가는 중년의 하루들.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루지  못한  것들의 후회하고, 지난  상처를  잊으려고 노력하며 살아가는 게 아니라, 계획된 작은 미래들을  실천하며  어제를 보내고, 오늘을 살고 내일을 맞이한다.

소소하게 계획된  미래를 휴대폰 일정에 추가하고, 알람을 설정하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가고, 한 계절이  끝이 날 무렵, 나는 또 일 년을 살아 냈구나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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