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옹다옹하다 Jun 07. 2024

평정심

늙은이의 징표

 평정심 - 9와 숫자들


방문을 여니 침대 위에 슬픔이 누워있어 그 곁에 나도 자리를 펴네

오늘 하루 어땠냐는 너의 물음에 대답할 새 없이 꿈으로


아침엔 기쁨을 보았어 뭐가 그리 바쁜지 인사도 없이 스치고

분노와 허탈함은 내가 너무 좋다며 돌아오는 길 내내 떠날 줄을 몰라


평정심, 찾아 헤맨 그이는 오늘도 못 봤어 뒤섞인 감정의 정처를 나는 알지 못해

비틀 비틀 비틀 비틀 비틀거리네 울먹 울먹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

역시 내게 너만 한 친구는 없었구나 또다시 난 슬픔의 품을 그렸어


내일은 더 나을 거란 너의 위로에 대답할 새 없이 꿈으로


평정심, 찾아 헤맨 그이는 오늘도 못 봤어 뒤섞인 감정의 정처를 나는 알지 못해

비틀 비틀 비틀 비틀 비틀거리네 울먹 울먹 울먹이는 달그림자 속에서

역시 내게 너만 한 친구는 없었구나 또다시 난 슬픔의 품을 그렸어


https://youtu.be/3lb1_9G5Npc?si=6oFlY_QFjaus2tJZ


 차를 타고 가다가 남향이라 햇볕이 잘 드는 조용한 시골 동네를 지나쳤다. 시내와 멀지 않고 적당히 한적한, 집터로 적합한 토지를 보며 이런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색 잔디로 덮인 마당에서 개와 고양이와 뛰노는 그림을 그려 보았다. 편리한 도심과 아파트, 사람들과의 만남을 선호하던 내게 찾아온 생소한 변화였다. 젊은이에서 늙은이로 넘어가는 기점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늙은이 쪽으로 거의 넘어왔다고 봐야겠다.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 늙은이의 징표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던데. 티브이를 봐도 언젠가부터 '6시 내 고향'이나 '나는 자연인이다' 같이 꾸밈없이 그저 사람 사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프로를 선호했다. 어쩌면 사람에게 느낀 실망과 시척지근한 신물 때문에 푸근한 인간미를 그리워하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적막한 산속에 소박하게 집을 짓고 홀로 유유자적하며 지내는 자연인들은 하나같이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간직하고 있었다. 얼마나 치이고 시달렸으면 소유와 인간관계의 미련까지 전부 버려두고 산으로 도망쳤을까. 자연이 주는 천연의 힘으로 심신의 질병을 치유한 사람도 더러 존재했다. 몸과 마음은 연계되어 있어서 마음을 좀먹고 잠식하는 심리적 긴장 상태가 계속되면 심장병, 위장병, 고혈압 따위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켰다. 나를 갉아먹고 있는 스트레스를 분석해 보았다. 하나는 직장에서 사람 때문에 부대끼는 일, 다른 하나는 업무의 압박으로 인한 심리적 긴장 상태, 두 가지 모두가 먹고살기 위한 밥벌이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다. 만약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고 밥술에 대한 걱정에서 탈피한다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올까. 그러나 일단 돈이 없다. 그리고 아직 은퇴하려면 17년이나 남았다.

 봄이 차창 밖 풍경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들판에는 자연이 선물한 일용할 양식으로 축제가 벌어졌다. 새하얀 냉이꽃의 흔적을 보며 냉이가 지천인 곳을 그냥 지나쳤다며 아쉬워했다. 강아지, 우리와 산책을 하며 노란 민들레 꽃을 발견했다. 우리가 코를 비비며 벌름거리자 꽃씨가 흩날렸다. 우리를 따라서 후 하고 바람을 불자 우주를 부유하는 먼지처럼 유영하는 민들레 꽃씨를 볼 수 있었다. 민들레잎을 된장과 들기름에 조물조물 버물여 무쳐내면 쌉쌀한 맛이 입맛을 돋우었다. 어렸을 때는 쳐다도 안 보던 봄나물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 또한 늙은이 구별법. 봄이면 맛볼 수 있는 두릅과 옻나물, 방풍나물, 머위, 곰취나물, 참나물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육식은 먹을 때는 맛있고 포만감이 있었지만 속을 더부룩하게 했다. 짜고 맵고 단 음식이 주는 자극은 오래지 않아 고통과 거북함으로 변모했다. 슴슴하고 밋밋한 본연 그대로의 매력이 진짜배기 풍미라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어야 했는데. 산책을 마치고 장모님이 차려 주신 저녁상을 대했다. 된장찌개와 상추 겉절이, 오이소박이, 고춧잎 무침을 먹었다. 모두 직접 농사지어 경작한 식재료였다. 억척스럽게 끌어당기는 우리를 따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저녁식사까지 마치고 나면 겨우 찾아온 평정심이 떠나고 다시 분노와 허탈함이 찾아왔다. 젠장, 별수없이 슬픔의 품을 그리는 수밖에.


 고단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평소에 잘 바르지 않던 선크림을 덕지덕지 발랐다. 귀신처럼 하얀 얼굴을 하고 모를 심기 위해 처가로 향했다. 결혼한 지 4년이 넘었으니 벌써 네 번째 모내기였다. 이양기에 모판과 비료를 실어 주는 게 임무였다. 일 자체의 노동 강도는 높지 않았으나 종일 뙤약볕에 노출되는 것이 부담이었다. 논 한복판에는 그늘이 없었다. 모판을 가득 실은 이양기가 반대쪽으로 떠나면 모가 뜯긴 빈 모판을 털어 잽싸게 정리하고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불멍도 아니고 물멍도 아니고 논멍. 물만 흥건하던 빈 논이 앙증맞은 아기 모의 녹색 빛으로 채워지는 과정은 장관이었다. 하얀 무명 옷감에 아름다운 그림이 수놓아지듯, 공연장의 텅 빈 객석이 관객들로 바글바글하듯 빈 논이 생명으로 충만해졌다. 반듯하게 심긴 모 위로 비료도 넉넉하게 뿌려졌다. 비료는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고 벼의 생장을 촉진시킬 것이었다. 한 구간을 끝내고 다음 논으로 이동하다가 왠지 뿌듯하여 사진을 남겼다. 10시쯤 되었을까. 장모님과 아내가 새참을 준비해 왔다. 이양기를 운전하시는 어르신도 잠시 내려 음식을 드시며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참'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예뻐서 사전에 검색했다. '일을 하다가 일정하게 잠시 쉬는 동안', '길을 가다가 잠시 쉬는 공간', '일을 하다 잠시 먹는 음식' 모두 같은 참이란 단어를 쓰고 있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음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쉬는 시간과 공간, 음식까지도 포함하고 있었다. '내게도 참이 필요해.' 삼분의 이쯤 마치고 점심을 먹었다. 참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밥은 조금만 먹었다. 흙먼지와 더위에 갈증이 날 때쯤 아내가 우리를 데리고 차가운 커피를 가져왔다. "여보, 나 회사 그만두고 농사지을까?" 아내에게 농담 삼아 말을 던졌다. "오빠처럼 게으른 사람이 무슨 농사를 지어." 아내는 농담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다. 자기는 모내기도 안 하면서. "그래도 몸이 고단한 게 속 시끄러운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그렇게 농사일이 하고 싶으면 아빠처럼 직장 다니면서 하던가." 아내는 툴툴거렸지만 실은 내 농 속에 담긴 의미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비틀비틀하는 나를 묵묵히 기다려준 아내였다. "오빠, 그냥 존나게 버텨. 포기하고 안주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때는 정말로 늙은이가 되는 거야." 아내가 보온병을 들고 홀연히 사라졌다. 우리의 꼬리가 경쾌하게 원을 그렸다. 이제 마지막 구간만이 남았다. 누렇게 익은 벼로 가득할 황금들판을 그려 보았다. 피나 잡초처럼 쓸모없는 것들은 유독 빨리 자랐다. 곡식은 아주 천천히 자랐지만 눈부실 정도로 찬란한 열매를 맺었다.

이전 06화 고양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