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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옹다옹하다 Jun 25. 2024

꿈과 책과 힘과 벽

인내는 쓰다. 고로 그 열매는 달다.

꿈과 책과 힘과 벽 - 잔나비


해가 뜨고 다시 지는 것에 연연하였던 나의 작은방

텅 빈 마음 노랠 불러봤자 누군가에겐 소음일 테니


꼭 다문 입 그 새로 삐져나온 보잘것없는 나의 한숨에

나 들으라고 내쉰 숨이더냐 아버지 내게 물으시고

제 발 저려 난 답할 수 없었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갈 거야


꿈과 책과 힘과 벽 사이를 눈치 보기에 바쁜 나날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무책임한 격언 따위에


저 바다를 호령하는 거야 어처구니없던 나의 어린 꿈

가질 수 없음을 알게 되던 날 두드러기처럼 돋은 심술이 끝내 그 이름 더럽히고 말았네


우리는 우리는 어째서 어른이 된 걸까

하루하루가 참 무거운 짐이야 더는 못 간대두


멈춰 선 남겨진 날 보면 어떤 맘이 들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잘도 버티는 넌

하루하루가 참 무서운 밤인 걸


자고 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루는 더 어른이 될 테니

무덤덤한 그 눈빛을 기억해 어릴 적 본 그들의 눈을

우린 조금씩 닮아야 할 거야

https://youtu.be/SJUWooZnfVQ?si=4qzB7D5YMsxxyrV3



 처음 내 방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다. 비록 시골의 작은 아파트였지만 사글세를 전전하던 이전에 비하면 꿈만 같은 변화였다. 동생의 방은 겨우 책상과 침대가 들어갈 만큼 비좁아 불만을 토로했다. 게다가 습한 여름이 되자 벽지가 울고 곰팡이가 피었다. 내 방에는 책장과 책상, 옷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침대 머리 쪽에 전자 오르간이 놓여 있었다. 한 가지 단점은 베란다로 향하는 통로 형태여서 방을 통해서만 베란다로 갈 수 있었다. 엄마는 세탁기가 있는 베란다로 가기 위해 수시로 문을 열어젖혔다. 방 문은 잠금장치가 없는 미닫이 형태라서 안에서 잠글 수가 없었다. 나만의 영역이 생기면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모든 공간을 잠그는 것이었다. 책상 서랍 안에는 만화책, 일기장과 편지글, 친구에게 받은 편지가 보관되어 있었다. 엄마가 가끔 일기를 훔쳐본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 내 세계는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차라리 대놓고 물어봤더라면 기꺼이 다 말해줬을 텐데. 어쩌면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절실하던 시기였다. 비밀의 주체로부터 발설된 진실은 한없이 아름다웠지만 타의에 의해 까발려지자 신비를 상실하고 말았다. 엄마를 미워하거나 원망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는 새벽 예배에 가기 전 방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위해 기도하였다. 가정을 지키기 위한 엄마의 헌신은 처절할 정도로 치열했다. 아버지는 자기 행복을 위해 타인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사람이었다. 가정을 깨는 행위는 극에 달아 있었고 엄마와의 갈등도 첨예했다. 아파트로 이사해도 방음 장치는 작동하지 않아 소음은 여전히 영혼을 좀먹었다. 머리가 크자 순종과 두려움의 힘은 쇠약해지고 분노가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거역할 용기는 없어서 아버지와의 접촉을 회피할 뿐이었다. 입에 자물쇠를 걸고 방으로 꽁꽁 숨어들어 문을 굳게 닫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아버지의 행동 중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전자 오르간을 배우기 시작한 일이었다. 전에 해본 적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건반 악기를 배운다고 하더니 급기야 거금을 주고 키보드를 구입하였다. 집을 꾸미고 있는 가구와 가전제품 중 전자 오르간만이 값비싼 물건이라 조화를 허물었다. 간혹 오르간을 치기 위해 내 공간을 침범하는 것이 불쾌했지만 애정이 금방 시들해질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늘 그랬다. 기분에 따라 충동적으로 일을 벌이고는 회피와 방치로 일관하였다. 인내의 기운이 끈끈하지 못한 사람은 단념이 빨랐다. 그리고 섣부른 선택을 반성하기도 전에 새로운 곳을 기웃거렸다. 좀처럼 일찍 잠들지 못했던 나는 헤드셋을 귀에 대고 건반 위에 더듬더듬 코드를 눌렀다. 알고 있는 코드가 얼마 없어서 제멋대로 음의 구성을 만들어냈다.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은 불안정한 느낌을 주었다. 온음이 되지 못한 반음은 듣기 거북했지만 부조화가 선사하는 미묘한 쾌감이 분명 존재했다. 내 인생이 딱 맞아떨어지는 장조의 노래가 되지 못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반듯한 벽돌과 시멘트로 완벽하게 마감되어 아귀가 잘 맞는 벽은 견고하였다. 아무 돌이나 듬성듬성 올려 세운 내 벽은 불안정했지만 하필 바람이 통해 쉽게 무너지지도 않았다. 엉성한 벽 군데군데에 생긴 틈새에서 매일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렸다. 원목으로 된 학생용 책상은 새 방에서 침대 이상으로 오래 머물던 공간이었다. 책상에 앉아 주로 만화책을 읽거나 시나 소설의 밑줄 그은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곤 했다. 수많은 밑줄 위 글자 중 가장 좋아했던 문장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 중에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원래의 나와 타인의 시선 속 나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담임 선생님과 엄마는 나를 강제로 기숙사에 입소시켰다. 걸어서 통학이 가능한 위치에 살면서 무슨 기숙사냐며 저항했으나 둘의 콤비 플레이를 당할 수가 없었다. "저는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라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선생님은 호탕하게, 속에서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듯이, 그것도 꽤나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은 음악이 꿈이라고 말하면서도 내심 부끄러웠기에 왜 웃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 셋과 밴드를 하기로 하고 한참 뭉쳐 다녔다. 작은 개척교회에 다니던 두 친구 덕분에 교회를 연습실 삼아 연주를 할 수 있었다. 밴드 이름은 '마구간의 건아들'이었으나 행실은 건강하지 못했고 씩씩하지도 않았다. 라디오헤드의 'Creep'이나 너바나의 'Smell like teen spirit' 같은 곡을 카피했다. 기타라도 치지 않으면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이동 수단은 주로 친구의 오토바이였는데 엄마가 눈치를 채고 선생님과 상담을 한 것이었다. "꿈이라는 건 3단계를 다 만족시켜야 돼. 먼저 좋아하는 것이어야 하고, 두 번째로 잘하는 것이어야 해. 축구를 좋아한다고 모두가 축구 선수가 될 수는 없잖아. 네가 정말 음악을 미칠 듯이 좋아하면서 실력까지도 탁월한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재능이 좀 부족해도 노력 여하에 따라 꿈을 이룰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2단계까지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비웃음거리가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내 기세에 눌려 크게 웃은 것을 사과했다. "근데 3단계는 뭔가요?" "마지막은 옳은 것! 훔치는 것을 좋아하고 도둑질에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게 꿈이 될 수는 없잖아." 결국 기숙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선생님 앞에서 괜히 발끈했던 것은 정곡을 찔렸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었으니까.

 수업이 끝나면 저녁을 먹고 10시까지 자율학습을 했다. 기숙사에는 별명이 '라이'인 괴짜가 하나 있었다. 녀석은 전설로 불렸다. 아무도 그가 공부하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성적은 항상 상위권이었다. 학교 앞 도서대여점에 비치된 수백 권의 만화책과 무협지를 전부 섭렵했으며, 더이상 읽을 책이 없어서 직접 무협지를 쓴다는 소문이 돌았다. 녀석에게 가면 언제든 만화책과 무협지를 빌릴 수 있었다. "너는 동족이니까 보여주는 거야. 다른 사람은 절대 보여주지 마." 녀석이 만든 무협 세상 속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이상하기 짝이 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강하고 똑똑한 캐릭터는 없었다. 고수의 기술을 곁눈질만 해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재능도 없었다. 그렇다고 괴로움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끈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자들이 기피하는 추남이라서 모태 솔로인 주인공도 있었고, 당뇨로 인해 한쪽 발을 잃고 목발로 싸우는 남자도 존재했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대화하는 적을 답답하게 만드는 게 능력인 무사, 수줍음이 많아서 적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뒤에서 암살을 시도하는 암살자도 살고 있었다. 엉뚱한 등장인물들이 제멋대로 서사를 펼쳐가며 좌충우돌하는 이야기는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완독했다. "진짜 웃긴다. 완전 잘 쓰는데. 근데 왜 정상적인 인물이 하나도 없냐?" 라이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빈틈없이 완벽한 사람이 감동을 만드는 게 아니야. 미숙하고 서투른 틈새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거야. 참, 모태 솔로 캐릭터의 모티브는 너한테서 가져온 거다." "웃기네. 자전소설이잖아."

 기숙사 감독을 하던 사감 선생님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학생들에게 복창을 하게 시켰다. '인내는 쓰다. 고로 그 열매는 달다.' 왜 앞뒤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하지만'이 들어가지 않고 '고로'라는 접속 부사가 들어가는지 항상 의문이었다. '고로'는 앞 문장의 원인이 되는 문장을 불러왔다. 사감 선생님의 표현에 의하면 인내와 열매 사이에는 필연적인 인과관계가 존재했다. 인내가 쓰기 때문에 열매가 단 법이며, 달콤한 열매를 얻기까지의 과정에는 쓰디쓴 인내가 필수라는 논리 구조였다. '인내는 쓰다. 고로 그 열매는 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나는 서툴고 틈이 많은 사람이다. 고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빈 노트에 허튼소리를 끄적이다 무협 소설을 써 보기로 했다. 또라이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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