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그늘>
기억을 감싸 안는 몽연에 가려 정확히 언제였는지 기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스무 살 풋풋했던 시절 비가 오고 진한 흙냄새가 나던 봄날이었던 듯하다. 가느다란 새싹이 빗물에 젖어 하얀 솜털 위로 물방울이 아롱거릴 때, 우산 하나에 서로를 기대 말캉한 두 손 맞잡고 길을 걷던 어린 연인들은 감미롭고 청초한 향기에 이끌린 발걸음을 멈췄다.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해 수줍음이 많았던 사내 녀석은 멈춰 선 곳의 어둡고 흐린 하늘에 비춰 밝고 환한 빛을 내던 프리지어 한 다발을 자신이 처음으로 사랑했던 그녀에게 살며시 건넸다.
이때부터였을까?
콧속까지 얼어붙던 겨울이 지나 매화가 피기 시작할 무렵, 노란 얼굴 내밀던 프리지어에 눈길을 주던 소년은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되어서도 싸늘한 봄날, 속눈썹 살랑거리는 꽃바람과 옷깃을 파고드는 따뜻한 햇볕 아래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 꽃향기를 맡으며 길을 걷는다. 갈 곳이 있어 길을 나선 것은 아니다. 그저 마지막 찬바람에 숨어든 봄 햇살을 느끼고 새끼손톱보다 더 작은 꽃잎을 바라보며 스쳐 지나가는 향기를 맡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삶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며 그저 정처 없이 걸을 뿐이다. 이렇게 길을 걷다 보면 노랗고 맑은 길가의 동무들은 빨갛고 뜨거운 정열을 내뿜다 어느새 키를 넘는 이팝나무가 되어 더 진한 향기를 퍼뜨린다.
어두운 밤이었다.
그날도 술에 취해 길을 걷고 있는데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번 시작된 눈물은 그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신 나간 놈처럼 비틀거리며 울고 있는데, 순간 머리 위로 스치는 향기가 있었다. 넋을 놓고 올려다본 그곳엔 하얀 이팝나무의 꽃이 조롱조롱 매달려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또 청승맞게 혼자 울고 있냐는 듯 하얀 잎을 활짝 펴며 웃고 있길래 걸음을 멈춰 이팝나무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밑에서 내가 사랑했던 그녀의 푸근함 같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깊은숨을 들이쉬자 폐부를 터질 듯이 가득 채웠던 이팝나무의 웃음은 다정히 내 얼굴을 감싸 안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래서 한 발자국도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때 이곳을 벗어나면 미쳐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팝나무가 만들어준 어둠과 웃음 속에 나를 숨겼다.
만약 여기를 벗어나 세상 속으로 나가게 되면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잃고 ‘어떻게 여태껏 참고 견디기만 했누?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나를 포기할 게 분명했다. 그래서 몇 시간이 지나도 그 공간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렇게 그날 우연히 마주쳤던 이팝나무의 웃음과 자신의 몸을 던져 내게 만들어 준 진한 꽃향기의 단절된 공간 속에서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길 수가 있었다.
퇴근길에 저녁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가는데 길 건너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가 보였다. 불현듯 찾아온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게 해준 그날의 진한 향기는 아니었지만 길 건너 저 멀리 서 있는 이팝나무가 그때처럼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고…”
“포기하지 않아서 나를 볼 수 있고 자신의 향기를 또다시 나눠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그러니 앞으로 다시 찾아올 5월이 될 때까지 삶의 끈을 놓지 말고 지금처럼 잘 살아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때처럼 활짝 웃는 하얀 얼굴을 보며 끝내 그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