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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디기 힘든 날이 있다.

<불안의 그늘>

by 꽃비
아무 이유 없이 견디기 힘든 불안이 차오르는 날이면 간절히 사람이 그리워진다.


꽁꽁 비끄러맨 마음의 빗장을 열고 눈물 한가득 그렁그렁한 눈으로 상대를 보고만 있어도 이 고통의 찰나를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이런 순간이 찾아오면 촉촉이 젖어 드는 뜨거운 눈시울을 느끼며 쓰린 가슴 붙잡고 그 눈물을 삼킨다. 예전엔 몰랐지만 이젠 어렴풋이 알고 있다. 내가 먼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옆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이 가진 불안은 전염성이 매우 강하다. 내 안의 부정적인 에너지는 표정, 말투 혹은 행동 속에 숨어 삽시간에 주변으로 퍼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누적된 불안의 그림자는 그 크기를 더해 주위 사람들을 침범하기 시작하며 결국 마음의 경계를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나로부터 전이된 불안을 감지한 사람은 침입을 예상했다는 듯, 자신의 밝음과 따뜻함, 애처로움으로 싸워보지만 오래지 않아 소진된 감정의 벽에 나에 대한 마음을 잃고 만다.


내게 너무 과분해 보여 사랑하지 못할 거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다가가지 못하고 곁에서만 맴돌았다. 쉽게 용기를 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그 마음을 거두지도 못했다. 이도 저도 아닌 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데 어느새 그 사람도 내 주위를 맴도는 게 느껴졌다. 애매모호함에 서로 고백을 못 하고 눈치만 보는 듯했다. 그러다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됐고 그렇게 우린 연인이 되었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를 알던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고 했다.


“그분 어둡고 침울해 보일 때가 많던데… 괜찮겠어?”


“그런 면이 있긴 한데, 우울하고 상처가 많은 것 같아도 내가 곁에서 감싸 안고 보듬어주면 밝고 따뜻해질 수 있을 거야.”


이런 마음이었다. 내게 느낀 불안과 우울을 조금이라도 없애 줄 수 있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그 믿음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상대의 아픈 마음을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든 것이 고통으로 변했다. 사랑했던 마음도,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나의 불안과 어둠까지도 말이다. 사랑했던 것만큼 강했던 믿음은 크나큰 상처가 되어 그녀의 마음을 할퀴었다. 그리고 점점 어둡고 쓸쓸하게 변해가는 그녀를 보며 나 또한 무너져 내렸다.


“자기를 사랑했을 때, 내가 옆에 있으면 밝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를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


물론 이것이 나를 떠난 이유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짜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끊임없는 불안 속에 허우적대는 나를 보며 그 감정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게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자꾸만 꼬이는 감정의 선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깊고 두터운 인연의 끈을 끊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구원자가 되겠다는 환상 또한 서로의 관계에 악영향을 줄 뿐이었다.


우리 모두는 상대방의 구원자가 될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져 있다면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겠지만 도울 수 없다. 오히려 그런 마음보다 너와 나의 관계에 집중하며 지금의 시간을 사랑하는 것이 연인을 위한 길이다. 불안과 우울에 빠진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닌 오직 내 자신뿐이다.


이렇게 언제나 혼자인 나는 오랜 불안과 외로움에 지쳐 사람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차오르는 날이 오면 그 감정은 배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 하지만 이젠 알고 있다. 내가 먼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곁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고 없이 몰아치는 인생의 혼란과 대인 관계의 진득한 피로감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사랑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나를 사랑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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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미칠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하는 날이면 맑고 청량한 바람 소리, 숲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귓가에 은은하게 들리는 산바람 소리에 나를 묻어 미지의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하고, 어지러운 감정이 고요히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린다. 조금 전까지 나를 흔들어 댔던 불안과 그에 따른 최악의 공상이 귓전에 불어오는 바람이 되어 저 멀리 날아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어릴 적 형성된 불안정 애착으로 안정적인 이성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나를 떠올린다. 여전히 혼자인 나를 돌아보며 그 아픈 마음을 성인이 된 내가 다독이며 감싸 안는다.


이제는 괜찮다고...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성인이 됐으니 이제는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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