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그늘>
외근을 다녀왔던 가을날 오후였다.
여느 출장과는 다르게 집으로 퇴근하지 못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마저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지만, 그냥 퇴근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렇게 사무실에 앉아 일하고 있는데 오후 5시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평소 같으면 받지 않았을 핸드폰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버님 성함이 베네딕토 씨 맞으시죠?”
“네,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 같아요. 집에 가보세요.”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여기 동사무소인데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것 같으니까아 집에 가보시라구요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일말의 감정도 섞이지 않은 채 아주 귀찮게 말하던 음성이 환청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끊겨버린 핸드폰을 멍하니 바라보다 눈물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있던 자동차 키를 앙칼지게 움켜쥐고 주차장으로 내달렸다. 운전하는 동안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물과 콧물이 섞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으면서도 웬 이상한 인간이 헛소리를 하나 싶어 아버지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그 횟수가 반복될수록 절망감과 불안감이 마음속에서 치받고 올라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 문을 박차고 나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때 내 눈의 젖은 눈망울에 온몸을 웅크린 채 홀로 엎드려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비쳤다. 그럴 리가 없다며 아버지의 몸을 흔들어 댔다. 그러나 그 몸은 한겨울의 냉기보다 차가웠고 그 어떤 것보다 더 단단했다. 나는 그때가 돼서야 두 번 다시는 아버지와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평생 메워지지 않는 가슴의 구멍이 되어 해마다 국화꽃 한 송이 꽃바람으로 피어오를 때, 나의 가슴도 한 떨기 시들어진 국화꽃이 된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투박한 방법으로밖에 표현할 줄 몰랐고 평생 약한 것만 사랑했던 내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30살이던 2007년의 가을, 자동차 브레이크등이 고장 났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본인의 세례명이던 베네딕토 성인 곁으로 떠났다. 그렇게 오직 사랑밖에 몰랐던 젊은 시절, 가장 사랑했던 그녀가 나를 버렸고 그 고통이 아물기도 전에 아버지마저 내 곁을 떠났다.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모습에 주저앉아 울기만 했다. 그러나 일교차가 너무 컸던 그해 가을, 홀로 추위에 떨며 자식들이 오기만을 기다렸을 아버지를 위해 힘겹게 수화기를 들었다. 천근만근 쉽게 떨어지지 않는 수화기를 들어 객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따스한 운구차에 아버지를 모셨다. 따뜻한 온기가 전혀 돌지 않던 아버지에게 하얀 이불 덮어 드리고 차가운 손을 꼭 잡은 채 방에 걸려있던 영정 사진을 가슴속에 고이 품었다.
“요즘 세상 좋아졌더라”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시에서 노인네들 챙겨준다고 원하는 사람은 영정 사진을 무료로 찍어준 대.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 미리 찍어왔지.”
“에이, 뭐 그런 걸 찍어 오고 그러세요.”
아버지의 죽음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뜻밖의 영정 사진을 찍어 온 아버지에게 애꿎은 타박만 했었다. 그날 이후 기억 속에서 사라졌던 그 사진은 이제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들을 마주 보고, 객지에 있는 가족들을 만날 것이며, 친구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할 것이기에, 내 몸의 더운 피가 흩어져가는 아버지의 육신을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영정 사진을 안고 도착한 장례식장은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서류 절차를 마치고 아버지를 수습하는 동안 객지에 있던 가족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빈소에 들어서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막내아들이자 장남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이 없음을 알았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결정하지 않았던 일들이 상주라는 이름의 족쇄로 다가왔을 때 슬퍼할 겨를이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왼팔의 검은 두 줄에 나를 기대어 홀로 염을 하고 문상객을 맞이하며 향을 피웠다. 문상객이 뜸해지는 새벽 시간이 되면 아버지의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술 한잔 고이 올렸다. 그 뒤 너무 힘겨웠을 이생에서의 짐을 활활 다 태워버리고 가느다란 연기가 되어 좋은 곳으로 편히 가시길 간절히 염원하는 마음으로 다 타버린 향을 새로 피웠다.
내 아버지는 한평생 아픔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 삶을 바꾸고자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로 인한 좌절감에 철모를 막내아들과 넷째 딸을 품에 안고 처절히 통곡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던 어린 자식들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에 젖어 같이 따라 울었다. 그 와중에서도 끼니를 거른 자식들에게 자장면을 먹이면서 정작 본인의 빈속에는 곡기 대신 뜨거운 소주를 들이부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눈 내린 어느 겨울날, 하늘에서 쏟아지던 눈발에 신이나 뛰어다녔던 그 시간, 버스 기사였던 아버지는 눈길에 미끄러져 사람이 사망하는 교통사고를 내고 말았다. 일곱 식구 겨우 입에 풀칠하며 먹고 살던 형편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 합의금을 마련했지만, 아버지의 구속은 피할 수가 없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없는 삶은 참으로 비참했다. 시장에서 날품 팔아 자식들 학교 보내기도 버거웠던 어머니는 한순간에 일곱 식구의 가장이 되었다. 먹고 살길조차 막막했던 그때, 우리의 사정을 알던 동네 주민들과 동사무소의 도움으로 밀가루와 정부미를 받아먹고 남들이 버린 옷을 주워 입으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어머니 손을 잡고 면회 길에 따라나선 적이 있다. 그때 내 눈에 비친 철창 속의 아버지는 죄수복의 수인 번호만큼이나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고 고통이었다. 이것이 아버지의 삶이었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퇴근길에는 양손에 자식들 주전부리를 잔뜩 챙겨왔다. 그리고 쉬는 날에는 다섯 명의 자식들과 노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듯 삶의 고된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지금과 달리 놀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감자에 싹이 나서’라는 아이들이 하던 놀이를 작은 밥상에서 함께 부르며 같이 놀아주던 아버지는 본인의 칠순 잔치를 불과 한 달도 남겨두지 않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제주도를 밟아 보지도 못한 채 한 많던 짧은 생을 마쳤다. 술 한잔 마시면 항상 농담처럼 얘기하곤 했다.
“나 죽으면 묻지 말고 화장해서 자유롭게 훨훨 뿌려라.”
평소 아버지의 유지대로 화장은 했으나 차마 뿌릴 수가 없었다. 바람 따라 산과 들로 세상 구경 다닐 수 있게 뿌려 달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뿌려버리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버지 뜻에 반하여 너무 좁은 추모관에 모셨다. 화장터에서 작은 단지에 담긴 아버지의 몸을 안았다.
엄동설한의 냉기보다 더 차가웠던 아버지의 몸은 자신의 육신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온기를 내 팔과 가슴속에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제는 헤어져야 한다는 듯 부모의 마지막 따뜻함을 영원한 기억으로 남긴 채 관리번호 2-3034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왼팔의 검은 두 줄을 내려놓고 나서야 내게 밀려왔던 슬픔은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폭풍이었다. 그래서 혼자 골방에 처박혀 몇 시간 동안 울기만 했다. 그때 흘러내렸던 눈물은 가슴속의 작은 개천이 되어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고 잔잔한 내가 되어 흐르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9월이 되면, 커다란 홍수가 되어 가슴속을 깊이 할퀸다.
한 계절 뜨겁게 꽃피우고 잎을 드리웠던 샛노란 아름다움이 국화꽃 한 송이 꽃바람 되어 서늘한 냉기가 될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린 상실의 기억들은 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언제쯤 이 상처가 잊힐지 나는 모른다. 언제쯤 웅크려 있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질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버지가 주신 마지막 온기로 언제나 글을 쓰고 생각하며 그렇게 아버지를 추억할 것이다.
마루에 신문지 깔고 삼겹살 구워 술 한잔 따르던 십수 년 전의 그때로 돌아가 그 기억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내 나이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을 쓰며 오늘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