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의 그늘>
젖은 이슬비가 내리던 가을의 초입, 귀를 간지럽히는 귀뚜라미 소리와 함께 지난 시간을 돌아본다.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 안던 바람, 숨어 있는 짙은 갈내음을 드러내는 처마 위의 소낙비, 칼칼한 뱃속을 따스히 감싸 안던 하얀 쌀밥 한 알, 의식하며 살지 않기에 존재감도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있었고, 메마른 마음을 적셔준 비가 있었으며, 마음의 허기를 달래 주던 푸근한 음식이 있었다.
이렇게 이 세상엔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각자 자신의 질서를 유지한 채 열역학적 안정성에 따라 의식되지 않는 존재로 실존하는 것이 있다. 이곳에 존재하는 실존의 정체성은 어떤 인위적 조작 변수에 의해 그 형태가 변할 수 있는데 정해진 조건과 범위 내에서만 사람과 자연의 몸을 순환하며 균형을 유지한다. 만약 그 약속을 깨고 어느 한계점 이상을 초과하게 되면 실존의 계면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한계점을 임계점이라 부르며 계면이 사라진 물질을 초임계 유체라 한다.
사람도 자연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유기체이므로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고 실존한다는 근거도 없지만 분명 사람에게는 임계점이 있다. 임계점 내에서는 정신과 육체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강건한 자아를 형성한다. 하지만 만약 이 한계선을 넘어서면 그 경계를 잃고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하며 이렇게 자아가 무너지는 것은 당신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나는 누구보다도 성공하고 싶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 끝없이 지어 나르던 공사판 막노동의 벽돌과 모래 짐의 무게 때문에 땀에 절어 온통 부르튼 발바닥만큼이나 치가 떨린 가난을 버리기 위해서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돈이 없어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거나 당연히 누려야 할 젊은 날의 열정과 패기, 순수한 낭만을 형체 없이 썩어버린 과일 껍질처럼 쓰레기통에 처박아야 하는 현실이 진절머리 나게 싫었다. 그래서 어떤 일이든지 미친 사람처럼 죽자 사자 달려들었다. 친구들은 그러다 죽을 것 같다며 나만 보면 적당히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나 내가 처한 현실은 나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끝까지 몰아붙이지 않으면 턱까지 차오른 수렁 속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소한 실수와 실패도 용납하지 않았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땐 더 열심히 하지 않은 내 탓으로 돌렸다. 성공하지 못한 일이 노력과 전혀 관계가 없거나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데 실패의 원인을 내게로 돌리며 잔인할 정도로 자신을 다그쳤다. 젊고 건강할 때는 이런 식으로 사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견딜 수 있는 체력이 있었고 지쳐도 다시 뛰어갈 열정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스로 한계를 정하면 그 지점이 정말 자신의 최대치가 되어 더 이상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가 없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을 믿고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이룰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현실로 만드는 가장 강한 원동력이 된다. 물론 운도 따라줘야 하지만 그것도 기본적인 노력이 없으면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강한 긍정에 취해 그 이면에 숨은 부작용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에너지를 한 곳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로지 이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단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다 보면 자신이 삶의 어디에 서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생긴다. 가장 중요한 건강을 해치지 않고 정서적 안정과 유대감을 유지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지 못하고 몰아붙이기만 하는 삶은 결국 큰 부작용을 낳는다. 그 시간이 길면 길수록 삶에 대한 파괴력도 이에 비례하여 커진다.
자연계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계면의 경계가 있다. 그 경계가 무너지면 많은 문제가 일어난다. 육체에 질병이 찾아오고 우울과 불안, 공황 장애 같은 정신질환으로 자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번 사라진 계면의 경계는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안의 에너지를 전부 소진하여 넘지 말아야 할 임계점을 넘어버리면, 아무리 잘 먹고 잘 쉬어도 이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경계선에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삶이 무너지는 쪽으로 인생이 변한다. 따라서 일에 매몰되어 임계점을 넘어서며 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만족하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의 대가는 얼마만큼의 에너지를 쏟아부었는지 보다 언제까지 지속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