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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와 전이

<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

by 꽃비

<일러두기>

1. 치료자는 정신적 혹은 심리적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치료할 수 있는 전문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으로 정신과 의사, 임상심리사 또는 상담심리사 등을 통칭한다.

2. 내담자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정신적 또는 심리적 문제나 장애를 가지고 전문적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정신건강의학과와 심리 센터 등에서 상담 치료를 받는 환자들이다.



길을 걷다 아무 이유 없이 울었다.

그리고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사유를 반복적으로 찾고 있었다. 이렇게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져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오갈 때 의사 가운도 입지 않은 수수하고 평범한 모습의 치료자를 만났다. 진료실에서 간호사 없이 의사와 마주하는 상황은 처음이라 물어보는 질문에만 간신히 대답하고 첫 상담을 마쳤다.


처음 몇 주는 너무 불편했다. 지금껏 살면서 내 감정에 집중해본 적이 없었기에 이곳에서는 내담자 자신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예약된 날짜에 병원에 가면 치료자와 무슨 얘길 해야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몇 달이 지나자 그 공간이 슬슬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았고 치료자가 이끄는 대로 마음속의 상처를 끄집어내는 것도 조금은 수월해졌다


이렇게 시작된 상담 진료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치료자와 심리적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내 고통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가슴 아파하던 치료자의 눈을 보며 그곳에 드리워진 깊은 공감의 바다를 읽었다. 그리고 그 바다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헤엄치게 하는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가슴 언저리에 칼날처럼 박혀 작은 움직임에도 많은 피를 흘리게 하는 눈물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무디게 만들어줬다.


그리고 드러낼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하는 엉망으로 엉켜버린 마음속 실타래를 함께 풀어가는 시간의 대화는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뚫고 들어와 치료자에 대한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이로 인해 치료자와 달리 넘어서는 안 되는 감정의 선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치료자와 관계 구분이 모호해져 내 감정을 통제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때론 정신과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를 넘어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와 무너지지 않는 심리적 안정감이 되기도 했다.


내담자는 치료자와 함께하는 상담 시간 동안 사적인 관계가 아닌 공적인 사이로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렇기에 치료자와 내가 사적으로는 전혀 관계가 없고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때 느끼는 감정적 혼란이 너무나 크다. 어떤 사람은 배신감과 분노로 나타나기도 하고 나처럼 견딜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이 절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혼란스럽다. 마음속의 길을 안내해 줄 촛불 하나 켜두지 않으면 치료자가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마음의 조명을 모두 끄고 어둠 속에 숨어 나를 감췄다. 생각지도 못했던 정신적 혼란에 먹어서는 안 되는 술에 손을 댔고 약과 알코올에 취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신을 잃었다.


치료자가 출산 휴가를 떠나기 하루 전, 꿈을 꿨다.

꿈속의 나는 평소처럼 진료실에 앉아 있었다. 치료자와 나를 제외한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는 비밀의 공간 임에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너무나 기가 막혔다. 그리고 이렇게 되기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치료자에게 분노해 진료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치료자는 내 뒤를 따라 나오며 눈물 한가득 고인 눈으로 나를 보며 내 양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이 너무 치욕적이라 거칠게 뿌리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치료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힘을 써도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젠 치료자가 떠나야 할 순간이 됐다. 나를 버리지 말라는 애절한 눈빛으로 치료자를 애타게 부르며 붙잡으려 했으나 전혀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나를 두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처럼 매몰차게 뒤돌아서더니 자신의 길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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