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내가 나을 거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좋아질 수 있다는 꿈이 사라지게 되면 끝없는 절망이 찾아왔다.
불안과 우울을 끌어안고...
뭉개진 마음으로 한순간과 찰나를 견디면서도,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살고자 하는 생욕까지 앗아가는 우울함이 아니었다. 공황 발작의 전조 증상인 심인성 어지러움으로 급하게 벤조를(벤조디아제핀, 신경안정제) 씹어 삼킬 때도, 시간이 멈춰 세상이 멈추는 것처럼 극한의 불안이 나의 모든 것을 멈출 때도 아닌...
내가 나을 거라는 희망이 사라졌을 때다.
착실히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으면 '지나간 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거라 생각했던 불안과 우울이 절대 끊어낼 수 없는 평생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그 절망은 나를 죽음으로 끌고 갔다.
그래서 어느 날 고층 건물 옥상에 올라간 적이 있다.
무거운 철제문을 열고 난간 끝에 다가서자 내 뺨을 스치던 바람결은 아래를 향해 큰 걸음을 뛰면 곤두박질치며 추락하는 게 아닌 새처럼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단지...
아래를 향해 힘차게 뛰어내리면 나를 옥죄고 있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펄럭~ 펄럭~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유로움이 느껴졌고, 그 순간의 유혹이 너무 강렬해 난간을 붙잡고 한참이나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병원에 다닌 지 2년쯤 되었을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끝을 알 수가 없기에 처방받은 약이 부질없어 보였고 치료자와 함께하는 상담 치료도 거부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병은 약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했고 치료자와 함께하는 상담 시간도 휑하니 뚫려있는 마음을 채워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과 상담 치료를 거부했다.
모든 것을 거부하며 어떻게 치료자가 내담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나처럼 아파 본 적이 없고 내가 경험하고 고통받았던 기억이 없는데 어떻게 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따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을 느껴본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렇게 따져 묻던 나에게 여전히 감정 변화가 없는 표정과 담담한 말투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치료자 자신의 얘기를 했다. 지금은 자신의 치료자가 미국에 있어 중단되기는 했으나 3년이란 시간 동안 치료자 자신도 나와 같은 여행을 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당부하기를 언젠가는 반드시 깨닫는 순간이 올 거라고 했다.
그래서 그 대답에 “내가 병원에 와서 도 닦으라는 말이냐? 성불하라는 얘기냐?”라며 한없이 울었다.
나는 치료자에 대한 강한 전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상담 시간에 치료자의 감정 상태를 궁금해했다. 온종일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이 힘들지는 않을지, 그래서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라도 치료자가 웃기를 바랐다. 이런 마음으로 치료자의 감정 상태를 물었다. 그러면 치료자는 항상 내 이야기로 돌아가자고 했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감정 상태라고 했다.
지금 이 시간은 치료자 자신이 아닌 나에 대해 집중하는 시간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항상 되물었다. “지난 2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잠은 잘 자는지? 급격한 감정 변화가 있을 만한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러면서 내가 비춰주는 마음의 빛을 따라 내 심리 상태로 들어왔다.
정신과를 다니고 상담 진료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을 알아가는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고통의 원인을 찾고 그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 여정에 방해가 되는 신체적 증상들이 있다면 약물로 다스리며 치료자와 함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심리적 여행을 떠나는 게 정신과를 다닌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삶을 지속해야 하는가? 그 끝은 있는 것인가?’ 헤아릴 수 없는 막막함에 다시 한번 좌절하게 되지만 끝은 있을 것이다. 분명 어느 시점을 지나게 되면 이전과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 이 감정까지 도달하지 못했다면 치료자의 손을 잡고 열심히 걸어가면 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싶은 순간이 와도 마음 달리 먹고, 다시 한번 신발 끈 동여매고 내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걸어가 보자.
그러면 언젠가는 끝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