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하지 않는 이야기>
정신과에 다니면서 건강보험 처리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보험 진료를 받으면 치료비가 저렴한 대신 정신과 질병 코드가 의료 기록에 남고 비보험 진료를 받으면 그 반대가 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양날의 칼을 손에 쥐여 주며 베이지 않게 잘 잡으라는 난센스 같았다. 예전보다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고 대중매체를 통해 우울과 불안을 겪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보니 병원에 가고 의료 기록이 남는 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만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범국민적인 계몽 운동을 통해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사회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대변혁이 필요할 정도로 의식 수준이 낮다. 이렇게 사회적 의식 수준이 낮은 만큼 자신에게 정신 질환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참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환자에게 가장 맘 편한 방법은 비보험 진료이다. 그러나 40분 상담 시간을 기준으로 대략 15만 원 정도의 병원비가 나오고 2주에 한 번꼴로 진료를 받으면 한 달에만 30만 원의 병원비가 든다. 일 년이면 얼추 계산해도 300만 원이 넘는다. 이 금액은 오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정신 질환의 특성상 비보험 진료를 선택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나는 2017년부터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2년을 비보험으로 진료받았다. 그때 들었던 병원비만 700만 원이 넘는다. 많은 진료비를 내고 가상의 90대 할머니가 되어 병원에 다니다 이렇게 치료를 지속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보험 진료로 전환했다. 이에 지난 2년 동안 비보험 진료를 받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어떤 선택이 환자에게 최선인지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고자 한다.
먼저 비보험 처리는 정신과 진료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 자신의 정신적인 문제를 인정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고 주변 사람들, 특히 가족의 이해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 있다면 정신과 치료를 시작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 기록에 F코드 (정신과 진료기록)가 남는 것은 심리적으로 상당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치료가 꼭 필요한데도 이것 때문에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이런 경우라면 비보험 진료를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한두 번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진료 기록이 꺼려져 아예 병원을 찾지 않는 것보단 낫다.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 의료 복지인 보험 진료에 대해 이렇게까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정신질환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 때문일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 종종 뉴스 일면을 채우는 정신 질환자의 극단적인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옳고 그름이 정해져 있지 않은 보편적 사회 통념에서 벗어난 일을 포용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이면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유가 어찌 됐건 우울, 불안 장애 등을 앓고 있다면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렇기에 정신질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질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 자체를 남기고 싶지 않은 것이 사회적 동물인 사람의 본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20년 영국에서 코로나 확진자 수가 최고치를 기록할 때 많은 환자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본 영국 의료진은 한계를 넘어선 심리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례가 많았다. 밤새 홀로 죽어가는 환자들을 보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그 상황에서 느끼는 인간적 자괴감과 잊히지 않는 그 모습이 잔인한 기억이 되어 그들을 극단적 선택으로 몰아갔으나 이에 대한 어떤 정신적 치료도 받지 않았다고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소속 의료진 8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71%가 정신적 문제를 겪었지만 이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사회적 편견에 시달리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지어 응답자의 44%는 “정신적 문제를 고백할 바엔 근골격계 질환이 있다고 말하겠다”라고 했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정신질환에 대해 대단히 자유롭고 포용적인 사회적 합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선진국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 강한 의구심이 들었다. 영국에서 이럴 정도라면 우리나라에서 정신 질환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커밍아웃에 버금가는 두려움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의 보험 진료에 대해 그렇게 민감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의 나처럼 몇 년 동안 비보험 진료를 받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닌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정신과에 대한 거부감은 자연스레 없어진다. 하지만 금전적인 부분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처방전 포함 14,000원의 병원비로 30분 정도 상담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보험 진료를 적극적으로 추천한다. 정신과 질병 코드가 의료 기록에 남는다고 해서 환자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기 어렵다.
환자의 동의가 없으면 의료 기록 열람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의료 기록을 확인하려는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나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다. 본인 스스로 말하지 않는 이상 회사에 알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한 취업 시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도 없다. 단, 정보 계열 같은 직업적 특수성이 있는 사람들은 조금 다를 수 있다는 말을 치료자에게 들었던 적이 있다.
그 대신 보험 진료를 받기 전에 반드시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개인 보험이다. 상해 보험이건, 실비 보험이건 정신과 진료 기록이 있으면 어떤 종류의 보험에도 신규로 가입할 수 없다. 보험사는 신규 보험 가입자에 대한 진료, 처방 기록을 확인할 수가 있기에 정신과 진료 기록, 즉 F코드가 있으면 어떤 보험이건 신규 가입이 어렵다. 현 실정이 이러하니 반드시 보험 가입 내역을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개인 보험을 먼저 보완한 뒤 의료 보험 진료를 받아야 한다. 나도 기존의 암 진단비가 부족해 암 보험 추가 가입 후 비보험에서 보험 진료로 전환했다.
연말 정산 시 의료비 공제 부분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국세청 간소화 서비스에서 제공하는 의료비 명세서를 받아보면 진료받았던 병원의 이름이 전부 나오지는 않는다. 이름으로 유추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회사에 제출되는 자료이기에 마음이 편치 않다면 아예 의료비 공제를 받지 않으면 된다. 나는 연말 정산 환급금보다 마음이 편안한 게 우선이다.
그래서 의료비 공제를 아예 받지 않는다.